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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내가 만났던 하나님 Confess (간증)

(간증) 사형선고 1

by 깜쌤 2017. 10. 30.

 

                                                         <2005년의 황성공원>

 

1987년 여름, 나는 그렇게 자살 유혹에 대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해 여름날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정말 바빴고 힘들게 보냈습니다. 교육대학을 다니느라고 4년제 대학의 학위를 취득할 기회를 놓쳐버렸기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공부도 해야했습니다. 

 

목에 이상이 생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현상은 여전했고 몸도 계속 아파왔기에 나는 경주시내 한가운데 있는 황성공원의 솔숲에 자주 갔습니다. 나는 꾸준히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 호소는 당연히 기도라는 모습으로 진행되었던 것이죠.

 

그해 처음으로 작은 집을 구했습니다. 그동안 전세를 살다가 집을 구했던 것이지만 집값의 반은 빚이었기에 부담이 컸습니다. 나는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기에 내가 번 돈을 보태서 동생들 공부를 시켜야만 했습니다. 교육대학을 가게된 이유도 집안 경제를 살리고 동생들을 위해 빨리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2005년 가을의 황성공원>

 

1970년대의 우리나라는 경제개발기였습니다. 저는 1973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사방에 취업자리가 널려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지간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취업은 그냥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학과는 4학년 2학기 정도만 되어도 입도선매 식으로 약속한 회사에 출근을 해야할 정도였으니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취업에 관한 한 꿈같은 시절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교육대학 입학하기가 요즘처럼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의 교육대학은 2년제였습니다. 남학생들은 대학을 다니면서 일주일에 여섯시간씩 반드시 군사훈련을 받고 여름방학때는 어김없이 군부대에 입소해서 다시 훈련병 과정을 밟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다 받으면 군입대를 면제해주되 의무적으로 7년간을 교사로 복무를 해주어야한다는 조건으로 선생을 했습니다. 본인이 원한다면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 입대해도 되었습니다. 학점관리에 실패해서 정상적인 졸업을 못하면 반드시 현역으로 입대를 해야했습니다. 그러니 남학생들의 경우 요령을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군사훈련단 제도를 우리는 흔히 ROTC라고 부릅니다만 교육대학생들의 경우에는 RNTC라는 이름으로 따로 불렀습니다.  

 

 

                                                    <황성공원 - 2005년>

 

당시의 남자 교육대학생을 분류하자면 세가지 부류의 학생들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군대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어서 군면제 혜택을 노리고 입학한 경우의 학생들입니다. 제 주위에도 그런 학생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대 내에서는 폭력행사가 빈번했기에 상급자의 폭행과 학대로 인해 골병이 들어서 제대한 경우가 제법 많았습니다. 그러니 군입대를 한다는 것은 얻어맞으러 간다는 것과 같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입대를 앞둔 남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상상이상이었던 것이죠. 

                                                                

두번째 부류는 가난한 집안 형편때문에 4년제 대학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가졌던 꿈은 일단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다가 더 공부해서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과서보다는 소설이나 역사서적이나 인문학 책들을 읽어보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역사학이나 법학, 언어학이 너무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게는 위로 두분의 누님이 있었지만 모두 다 많이 공부하지를 못했습니다. 특히 바로 위의 작은 누님은 저때문에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만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사실 제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누님의 상급학교 진학포기라고 하는 희생때문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아리기만 합니다. 그 사연은 아래 글상자 속의 주소에 실려있습니다.  

 

                           http://blog.daum.net/yessir/2361709

 

 

 

                                                      <황성공원 - 2005년>

 

세번째 부류는 그나마 철이 든 학생들이어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공부라는 것을 더해보고 싶어서, 아니면 교직이 매력적이어서 입학을 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교육대학은 4년제 대학이 아닌 2년제 대학이어서 교육대학생들이 느끼는 열등감은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고등학교때 저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들이 서울의 대학교나 내가 가기를 소원했던 국립대학교에 입학해서 멋진 대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수없이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교육대학생활에 철저하게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수없는 방황을 계속했습니다. 그 방황은 술마시는 생활로 이어졌고 술은 제 영혼을 철저하게 파괴시켜나갔습니다. 나는 소주 마시기에 일찍 맛을 들였습니다. 당시는 25도짜리 소주가 대세를 이루었는데 가난한 학생신분에 좋은 안주를 먹을 처지가 못되었기에 튀김 몇개나 새우깡 한봉지를 안주삼아 술을 마셔댔습니다. 

 

기차통학을 했던 나는 강생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열차내 판매상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강생회가 나중에는 홍익회로 이름을 바꾸어서 영업을 하다가 요즘에는 스토리웨이가 된 것 같습니다. 25도짜리 독한 소주한병에 새우깡 한봉지를 15분안에 다 비웠으니 만용도 그런 만용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1학년때였는지 2학년때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집으로 돌아가던 기차에서 마신 소주로 만취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다음칸으로 친구를 찾으러 갔습니다. 당시에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시대라 학생들은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서 통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차는 항상 만원이었습니다. 

 

술에 잔뜩 취해 있었던 나는 열차와 열차를 연결하는 부분의 승강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술이 취했으니 몸을 가누기 어려웠는데 철교 부근으로 들어서던 열차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덜컹거렸습니다. 제법 빠르게 속도를 올린 상태로 달리고 있었는데 기차가 덜컹거렸으니 나는 중심을 잃으면서 승강구 쪽으로 내몸이 기울어진 상태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로 저 철교입니다. 지금은 철교밑의 지형이 골재채취로 인해 많이 변해버렸지만 당시의 강바닥은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바위들이 여기저기 깔려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워낙 자주 기차를 타고 다녔으니 철로연변의 풍경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1초가 채 안되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추락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열차가 복잡해서 사람들을 피해 승강구 문 부근에 버티고 서있었던 어떤 중학생이 순간적으로 나의 가슴 부분 옷깃을 잡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멱살을 잡은 것이죠. 뒤로 추락해가던 나는 기적적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은 사실은 까만색 겨울 동복을 입고 있었던 작은 체구의 중학생이 내 멱살을 잡았을때 어떻게 그리 쉽게 끌어올려졌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는데 생사의 기로에서 나는 살아났던 것입니다. 추락했더라면 달리던 열차에서 철교밑으로 거꾸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바보처럼, 정말 바보처럼 나는 아직도 그 중학생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술이 취해서였기도 하지만 고맙다는 말도 한마디 남기지 못할 정도로 철이 없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이 글을 볼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감사의 인사를 깊이깊이 드리고 싶습니다. 그 상황과 위치를 정확히 알고 기억하고 있으므로 누가 가짜로 '내가 당신의 목숨을 살렸노라고' 엉터리로 장난을 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취상태였으나 순간적으로 술이 다 깼습니다. 내가 술이 그렇게 빨리 깨본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정도 사건이었으면 정신을 차려야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타락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소주를 많이 마셔댔으면 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려서 깜둥이가 된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대학 1학년때 7월 초였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이렇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자네는 세수도 안하고 다니는가? 왜 그렇게 얼굴이 까만가?"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본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제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거울이 귀하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집을 나오고 깜깜할 때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제 얼굴이 어떻게 변해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술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소주 마시는 양이 늘어갈수록 내 얼굴색이 달라져갔고 학교 공부에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소주를 마셔댔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도서관으로 직행해서 전공과는 관련이 없는 책들을 골라보았습니다. 책을 볼 때만은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내 도서관에 비치된 책을 반 정도는 읽어보고 졸업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정말 뻔질나게 도서관 출입을 해댔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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