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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북유럽,러시아-자작나무 천국(完

시굴다 트래킹 4

by 깜쌤 2017. 10. 4.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우리들은 흔히 로미오줄리엣 이야기를 꺼내든다. 아재 개그에 속하는 썰렁한 이야기겠지만 예전에는 이들의 이름을 패러디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한자로 노미호(老尾狐)와 추리해(醜痢害)로 써서 웃기기도 했다. 괄호속에 첨기해둔 한자를 보고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젊은이라면 그대의 한자 실력은 놀라운 수준임을 인정한다.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 동굴이 바로 라트비아인들의 마음속에 찬연히 빛나는 '투라이다의 장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구트마니스(혹은 구트만) 동굴이다. 구트마니스 동굴 바로 왼쪽 편에는 인공적으로 판 작은 동굴이 나무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동굴 앞 한쪽에 만들어놓은 안내판에는 투라이다의 장미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다. 

 

 

동굴은 그리 크지도 않고 깊지도 않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용암동굴이나 강원도 일원에 산재한 석회동굴을 생각하면 너무 잘못 짚은 것이다. 총길이가 20 미터도 되지 않으니 들어가자마자 곧 끝을 만날 수 있다. 규모가 그렇게 작다고 하더라도 라트비아인들에게는 큰 자랑거리인 모양이다.

 

 

동굴 밖 잔디밭에는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모여있었다. 아마 신랑신부와 양쪽 집안 식구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투라이다의 장미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서기 1601년 투라이다 성채가 스웨덴의 침입을 받고 함락되었다. 저항하던 사람들중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했는데 시신 가운데에서 태어난지 몇달밖에 지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가 스웨덴 종군사관의 눈에 발견되었다. 1601년 5월의 일이었고 그 군인의 이름은 그레이프였다. 

 

 

 

                                             <동굴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 줄기>

 

그레이프는 발견된 여자아이를 양녀로 삼아 길렀는데 커나가면서 보니 그녀의 미모가 워낙 뛰어났기에 사람들은 '투라이다장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사망자의 시신들 가운데에서 5월에 발견된 아이였기에 이름을 라트비아어로 5월을 상징하는 마이야라고 지었다고 한다. 

 

 

 

마이야는 시굴다 성(우리가 저번에 훑어본 바로 그성이리라)부근에 살고있던 정원사 빅토르와 사랑을 나누게되었고 두 사람은 구트마니스 동굴 부근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키워가다가 결국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다.

 

당시 투라이다 성에는 야쿠봅스키와 스쿠드리티스라는 두 사람의 폴란드 탈영병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한명인 야쿠봅스키가 첫눈에 마이야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야쿠봅스키는 마이야에게 청혼했지만 이미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던 마이야는 당연히 그의 청혼을 거절하게 된다.

 

 

 

 

청혼을 거절당한 야쿠봅스키는 어떻게하든지 마이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음흉한 생각을 품고 쪽지에다가 빅토르의 이름을 빌려 구트마니스 동굴에서 만나자는 내용으로 글을 써서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저녁에 동굴로 나온 마이야는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금새 알아채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는 야쿠봅스키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자기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칼이라도 막아낼 수 있기에 실험삼아 한번 찔러보라고.....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던지라 마이야의 말을 그대로 믿은 야쿠봅스키는 칼을 빼서 마이야의 목을 찔렀고 마이야는 이내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결과에 깜짝 놀란 야쿠봅스키는 숲으로 달려가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동굴에서 마이야의 시체를 발견한 정원사 빅토르는 투라이다 성에 쫒아가서 도움을 청했는데 현장에서 빅토르가 사용하던 도끼가 발견됨으로서 오히려 그가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재판 진행과정에서 진실은 밝혀졌다. 야쿠봅스키와 함께 있었기에 이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었던 탈영병 스쿠드리티스가 사실을 있는대로 고백함으로서 빅토르는 사면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고 마이야의 시체는 투라이다 성당옆 언덕에 안치되었다는 것이다. 

 

 

 

고결한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마이야의 거룩한 자기 희생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되었고 라트비아인들의 마음속에 오래동안 새겨져 기림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동굴 벽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있었다. 어떤 내용들은 사랑의 맹세를 담고 있기도 하단다. 살아오면서 느낀 것인데 사랑은 항상 움직이는 것이었고 사랑의 맹세는 참으로 덧없는 것이었다.  

 

 

동굴 밖에서는 한참동안 의식이 진행되었다.

 

 

반지를 교환하고 사랑의 키스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동굴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면 뭐 어떤 힘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이제는 없지 싶다.

 

 

투라이다의 장미로 칭송받았던 마이야가 죽은 해가 1620년이니 그녀의 죽음은 약 400여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만 나이로 치자면 19살, 한국식 나이 계산법으로 치면 스무살의 꽃다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셈이 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분들 모두가 다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구트마니스 동굴을 나와서 투라이다 성을 향해 걸어가면 아름답게 장식한 작은 건물이 나온다.

 

 

육각형 모습의 작은 판매대가 먼저 등장했다.

 

 

다양한 종류의 쿠키들이 바구니에 담겨있었다.

 

 

이번에는 붉은 색 지붕 밑에 햐얀색 벽을 지닌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사랑의 맹세'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나는 나나 무스쿠리가 부른 <사랑의 기쁨>이라는 노래를 한때 즐겨 불렀었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다. 원곡은 마르티니가 작곡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프랑스어로 된 가사로 노래를 부르면 더 멋있었는데.....

 

 

사랑의 맹세 건물 앞으로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더 가면 투라이다 성이 나타나겠지만 시간을 보니 더 늦으면 안될 것 같았다.

 

 

사실이 그랬다. 우리는 투라이다 성 몇백미터 앞에서 돌아섰던 것이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남겨두어야한다. 그래야만 언제 다시 한번 더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터키를 다섯번, 중국은 열번을 여행했었다. 터키는 어딘가 진한 아쉬움과 여운이 남는 나라였기에 가고 또 가기를 반복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컸기에 하나하나 짚어보는 의미에서 새로운 지방을 차곡차곡 찾아다녔다.

 

 

사드로 인한 갈등이 거의 풀릴 때까지 당분간 중국은 안갈 생각이다.

 

 

오지말라고 하면 안가면 된다. 그건 나의 소신이다. 올 필요없다는데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는게 내 생활 철학이기도 하다.

 

 

내 앞을 걸어가던 멤버 두분이 탁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아까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다. 왼쪽으로 나있는 도로 위를 차들이 한번씩 달려갔다.

 

 

가우야강에 걸려있는 다리를 건넜다.

 

 

산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길이 나타났다. 아까 성에서 나왔던 그 길이 아니다. 하지만 기차역 방향은 알고 있으므로 서슴없이 걸어올랐다.

 

 

나무계단을 다 걸어오르자 마을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깔끔하다.

 

 

온 사방이 공원이다.

 

 

 저런 식으로 꽃밭을 만들어도 되는구나 싶었다. 창의력이 놀랍기만 했다.  

 

 

우산을 형상화한 꽃밭 아닌가?

 

 

플라워 보울(Bowl)같다.

 

 

여기서는 사진기만 들이대면 모든 풍경이 그림엽서로 변한다.

 

 

유럽엔 그런 곳이 참 많다.

 

 

이런 풍경 속에서 산다면 정서 순화는 그저 될 것 같다.

 

 

아까 보았던 테니스 코트도 다시 만났다.

 

 

피자 가게 앞을 지났다.

 

 

마침내 시굴다 역이 나타났다. 벌써 저녁 5시 반이 넘었다. 구트마니스 동굴 부근에서 기차역까지 걸어오는데 한시간이 걸렸다.

 

 

버스 정류장에 리가행 버스가 보이지 않기에 시굴다 역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이 이렇게 넓고 크고 아름답고 한가한 나라도 드물지 싶다.

 

 

아무리봐도 시굴다 역 디자인은 너무 산뜻하다. 이런 색채감있는 기차역은 터키 중부의 내륙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다.

 

 

2015년 터키 중부의 시와스 기차역에서 찍은 사진이다. 느낌이 좀 비슷하지 않은가?

 

 

터키 시와스와  라트비아 시굴다!  기차역 이름에서 나는 느낌도 비슷했다.

 

 

역구내에는 화물차가 정거해 있었다.

 

 

'폴리쿠아'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경찰 사무소일 것이다. 기차역 안 부스에서 버스표를 샀다.

 

 

기차역을 구경하면서도 눈은 자주 버스 정류장을 더듬었다.

 

 

플랫폼에 나가 보았다. 기차역은 나에게 항상 우수를 불러 일으키고 항구의 부두는 이별을 떠올리게 했다. 

 

 

공항에서의 이별은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제일 멋없는 이별은 공항에서 하는 것이다.

 

 

리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손님을 싣고는 리가 시내를 향해 이내 출발했다.

 

 

나는 차창에 붙어앉아 바깥 경치를 살폈다.

 

 

올때 실컷 본 풍경이지만 한번 더 자세히 살피고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슬슬 졸기 시작했다.

리가 기차역 앞에서 내렸는데 그때 벌써 저녁 7시가 되었다. 두분은 장을 보러 가고 나는 호텔로 직행했다. 팀장 대접을 받은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분이 비를 맞을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배낭여행자가 메는 작은 보조가방에는 항상 우산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두분은 예상대로 비를 맞지 않고 돌아왔다.

 

수퍼에서 사온 빵과 돌배, 그리고 음료수와 아까 낮에 남겼던 피자로 저녁을 먹었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두었다. 일기를 쓰고나자 밤 11시 30분이 다 되었다. 이젠 자야한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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