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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7 베트남-월남의 달밤 1(完)

화려한 호아루 2

by 깜쌤 2017. 7. 17.

 

호아루는 약 50 여년 동안 두개의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용무늬같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꺼냈던 이야기를 계속해보기로 하자.

 

 

서기 968년경에 왕조가 여기를 수도로 삼았다. 딘왕조라고 했으니 한자로 표기하면 ()왕조다. 설립자는 선황제(先皇帝) 딘 보 린(Đinh Bộ Lĩnh 丁部領 정부령)이다.

 

 

딘왕조가 몰락한 것이 서기 980년이니 약 22년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레 호안( Lê Hoàn)이 세운 전려(혹은 전여前黎)왕조다.  태조는 여환(黎桓)이고 후기 레왕조와 구별하여 전기 레왕조라고 부른다.

 

 

전여 왕조는 호아루를 배경으로 해서 980년에 건국하여 1009년에 멸망했으니 약 29년간 유지했다.

 

 

그런 사실 정도를 알고 돌아보면 이해하기가 편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런 사실을 자세히 모르고 출발했다. 얼렁뚱땅 익힌 지식으로 어설프게만 알고 있다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조사하고 공부하여 알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자면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에 해당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등장하는 곳이므로 그렇게 알고 둘러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싶다.

 

 

베트남이라고 해서 중국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여기도 한자문화권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하리라.  

 

 

그런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건 미치 현 유럽의 문자와 문화가, 페니키아 글자에서 시작된 알파벳과 헬라(고대 그리스)와 라틴문화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자랑해야할 것은 한글 같은 독창적인 문자시스템이 아닐까?

 

 

호아루를 한자로 표기할 수 있을까? 당연히 가능하다. 호아루는 한자로는 (화려)로 표기한다.

 

 

호아루는 오늘날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탕롱이 등장할 때까지 베트남 역사의 중심지였다.

 

 

우리는 지금 딘 왕조를 창시한 딘왕조의 사당을 둘러보는 중이다.

 

 

실내는 어두침침했고 면류관을 쓴 인물이 가운데 앉아있었다. 그가 딘보린(정부령)일까? 

 

 

베트남에서도 나라를 건국하면 태조로 불러주는 모양이다.

 

 

조각상 앞에는 갖차려 놓은듯한 제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쪽에는 최근에 만들어져 시장에서 사온듯한 접시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실내에는 여러가지 기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종모양이 특이하다.

 

 

나는 다시 마당으로 나갔다.

 

 

사당 앞 마당에는 용모습을 한 조각이 통로 끝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기와지붕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여있는듯 하다.

 

 

백인 단체 관광객들이 꾸준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사당 앞은 거대한 공터다.

 

 

예전엔 여기를 주택들이 채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가 슬슬 뿌려대고 있었다.

 

 

사당뒤로는 논밭이 펼쳐지고 있다.

 

 

물 고인 저수지는 오리들의 놀이터가 되어있었다.

 

 

오른쪽 멀리 우리가 들어온 출입문이 보인다. 그 너머가 주차장이다.

 

 

나는 사당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발굴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베트남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중국 남부에서 남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가하면 남쪽에서는 인도 계통의 사람들이 유입된 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혼합된 문명이 오늘날의 베트남을 이룩한게 아닐까?

 

 

한자로만 보면 대월국(오늘날의 베트남, 월남 )군대가 주둔하는 군사용 성의 성벽을 이루던 벽돌이라는 말이 되는데.....

 

 

북방문화와 남방문화의 유입과 혼합은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도 그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옆에 자리잡은 무덤구역으로 넘어갔다.

 

 

나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래야만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자기 미화는 자만심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역사왜곡이라는 말이 왜 생겨나는가?

 

 

내가 보기에 역사왜곡이 지나친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과 중국같다.

 

 

그 두나라는 확실히 도를 넘은것 같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특히 그러하다고본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동이(東夷)의 활약상과 기원과 소멸에 대한 연구를 좀더 해주었으면 좋겠다.

 

 

서기 2000년, 중국의 고대도시 서안(옛날의 장안이다)에서 서안 박물관을 찾아갔을 때 나는 고조선의 위치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가는 벽면 전체에 커다랗게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고조선의 위치는 분명 만주를 포함하여 몽골과 중국 북부쪽으로 확대되어 표시되어 있었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몇년뒤 다시 찾아갔을땐 다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에는 필름 카메라를 쓰고 있었던 터라 필름 몇 커트 아끼느라고 그 귀중한 장면을 찍어놓지 못한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국력이 커진 중국은 이제 역사조작과 왜곡을 보통으로 알고 덤벼든다. 동북공정이니 하는 소리가 왜 나오겠는가 말이다.

 

 

지나친 민족주의와 국뽕은 수치스러움이지 자랑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도 고대사 영역에서는 그런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애국과 왜곡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도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우리 모두가 지닌 역사의식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방법의 차이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비판한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착잡함을 느꼈다.

 

 

나는 성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보았다.

 

 

성문밖에는 좁은 도로를 따라 민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네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어딘가 아직은 제법 느슨한데가 많은 것이 동남아시아다.

 

 

그게 동남아시아 여행의 매력이기도 하고....... 나는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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