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초등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7 베트남-월남의 달밤 1(完)

호이안 구시가지 1 - 광동회관

by 깜쌤 2017. 5. 6.

 

2017년 1월 12일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8시에 식당으로 가보았다. 식당은 거리 쪽에 붙어있었다. 식당을 맡은 요리사(?) 총각은 시간이 날때마다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었다.

 

 

백인들이 워낙 많이들 와서 그런지 서양음식도 제법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돼지고기를 얹은 굵은 면발을 지닌 쌀국수도 반드시 먹어봐야했다.

 

 

과일에다가 커피에다가 국수까지 가지고 왔으니 젊은이들 표현을 빌린다면 완전 득템이다.

 

 

뷔페식으로 차려놓았으니 자기마음대로 덜어와서 먹으면 되었다.

 

 

아침을 먹고나서는 내부 구경을 위해 3층으로 올라가보았다.

 

 

젊은이 한사람이 지나가는 바로 그 방이 우리가 머무는 방이다. 우리 방은 1층에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호이안의 성수기는 12월과 1월이란다. 거기다가 어제는 '호이안 전설의 밤'까지 보았으니 그런 사실을 모르고 간 우리로서는 횡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료 두분은 몸 컨디션이 좋지않다며 쉬겠다고 한다. 한분은 호텔 앞까지 따라 나왔다가 그만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나는 혼자서 거리구경을 하러 나서야만 했다. 

 

 

 혼자니까 편할 때도 있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구시가지다. 어제 밤에 구시가지를 대강 보았다고하나 밤풍경과 낮풍경은 확연히 다른 법이다.

 

 

Early Bird가 풍부한 먹이를 구한다고 하지 않던가? 일찍 일어난 상인들이 벌써부터 가게를 열어두었다.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법보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길가에 보였다.

 

 

우리나라 절 양식과는 제법 다른듯 하다.

 

 

아무래도 남쪽나라의 절들이 우리나라 절들보다는 좀 더 화려한 것 같다. 마당에는 분재들이 많았다. 나는 문간에 붙어서서 대강 살피고는 돌아나왔다.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구역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중간에 표를 점검하는 곳이 있다.

 

 

나는 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구시가지 탐방이 시작된다.

 

 

낮춤한 집들이 골목에 가득하다. 호이안은 한자로 회안()으로 표기한다. 아마 꽝뚱어(광동어) 발음이 베트남식으로 변한게 아닌가 싶다.

 

 

그런 예를 들어보자 현지인 발음은 빈훙인데 한자로는 영흥(永興)으로 해두었으니 이런 것도 좋은 증거가 될지 모른다. 전통건물을 사용하여 남국답게 노란색으로 칠한 호텔이었다.

 

 

골목을 나오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건물이 광동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착각하지는 말자. 현판에는 광조회관(廣肇會館)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잠깐! 티켓 소개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입장료는 12만동(우리돈 약 6,000원 정도)인데 명소 다섯곳을 들어가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명소에 입장할 때마다 한부분씩 가위로 끊어간다. 나는 광동회관을 첫번째로 들어가보았다. 

 

 

광조라고 이름했으니 중국 광동지방 출신들이 모여서 만든 회관겸 사당이리라. 중국 본토 광주옆에 조주라는 지방이 있지만 그 조주(潮州)는 한자가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두자.  

 

 

여기서는 아직도 번자를 볼 수 있었다. 180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건물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돈과 물질을 숭상하는 중국인들답게 만들어두었다.

 

 

첫눈에 내가 받은 인상은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바닥도 기둥에도 화려함이 가득했다.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누가 봐도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니던가? 왼쪽에 얼굴이 검고 털복숭이 같은 수염을 가진 자는 장비일 것이고 오른쪽의 얼굴빛이 붉고 멋진 수염을 가진 이는 틀림없이 관우일 것이다. 도원결의를 묘사한 그림일 것이다.

 

 

신주를 모신 제상을 보니 용과(드래곤 프루츠)와 오렌지, 바나나등을 바치고 향불까지 피웠던 흔적이 있다.

 

 

용을 상서로운 존재로 여기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여지없이 투과된 그런 회관이었다.

 

 

둘러볼수록 흥미진진했다. 사당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여자 그림이 등장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도 있겠지만 뱃사람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 된 티엔허우라는 여신이다. 어쩌면 그녀는 중국 남부지방에서 마조(媽祖)로 숭상받는 존재일 수도 있다.

 

 

장사를 업으로 삼고 멀리 남국으로 진출한 중국인들이 만든 회관겸 사당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원에도 많은 돈을 들인 흔적이 넘쳐났다. 중국인들의 남방 진출은 참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말레이 계통의 사람들이 북방으로 진출한 흔적도 동남아시아에는 골고루 흩어져 있다. 그런 충돌이 있어났던 대표적인 장소가 베트남이다. 

 

 

미썬 유적지를 남긴 참족들은 누가 봐도 남방계열의 민족이다. 그뿐이랴? 호이안에는 일본상인들까지 진출했었다. 1637년까지 일본상인들이 드글댔다는 증거들이 참으로 많이 남아있다. 광조회관(광동회관) 바로 옆에는 내원교(래원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그게 대표적인 증거다.

 

 

그런 것을 보면 조선정부는 참으로 무능과 우물 안 개구리의 극치를 달린 셈이다.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삼고초려를 주제로 한 그림이었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라는 두 결의 아우를 데리고 제갈량이 살고 있는 초옥을 세번씩이나 찾아갔다는 고사에서 생긴 말이 삼고초려다.

 

 

관우가 중국인들에게 재물과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재물을 관장하는 신 정도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부귀와 장수는 중국인들에게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까 싶다.

 

 

호이안은 중국인과 일본인, 남쪽 자바에서 온 자바인과 이슬람 상인, 그리고 나중에는 서양상인들까지 찾아와서 들끓었던 곳이니 지역별로 뭉치기를 좋아한 중국인들이 이런 회관을 남기지 않았다면 도리어 더 이상해질뻔 했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분열과 시기와 다툼으로 날새는 줄 모르며 패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정치가가 되는 우리 현실이 너무 서글프기만 하다. 일부 지도자들에게서는 정의를 독점한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그새 사람들이 제법 많아져 있었다.

 

 

언제 몰려왔는지 인력거도 제법 많이 몰려들었다. 신혼부부 한쌍이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짝을 맞추어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 흐뭇하고 보기가 좋다. 

 

 

나는 그대로 직진해서 강쪽으로 나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원교(래원교)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골목 양쪽으로 차려진 가게들이 너무 예뻤다.

 

 

갤러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대강 눈요기하는 정도로 슬쩍 보고 지나쳤다.

 

 

앞쪽에 내원교(來遠橋)가 나타났다. 멀리서 왔다는 뜻이니까 중국인 입장에서 일본인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교라고도 한다. 까우 낫 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라이 비엔 끼에우'라도 한다니까 래원교를 중국식 발음으로 읽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93년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강 건너편 중국인 주거구역과 연결하기 위해 만들었단다. 다리를 만든 시대적인 배경이 흥미롭다. 1593년이라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다음해이기 때문이다. 그 전부터 일본 상인들이 베트남에 진출해서 커다란 세력권을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에게서 총을 구입해서 조총으로 개량하지 않았던가?

 

 

나는 검표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다리를 넘어가기 전에 부근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