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도 먹었으니 가까운 산에 가서 트래킹이라도 해야했다. 론리 플래닛에는 수르프 그리고르 교회(Surp Grigir Church)와 죽타크방크(Jukhtakvank)가 마을 인근에 있다고 소개를 해두었기에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아그스테브강의 최상류쪽에 해당하는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짙은 녹음을 만들어내는 가로수가 즐비한 멋진 길이었다. 더군다나 한쪽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으니 물소리만 들어도 가슴까지 시원해지는듯 했다.
어느 정도 개울을 따라 걷다가 바나드조르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걸을 생각이었다. 오른쪽 산 봉우리에 세워진 라디오방송국 중계탑이 보였다.
아까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걸어서 다운타운으로 내려갔었다.
학교로 건너가는 작은 다리도 다시 만났다. 이제 상류쪽으로 올라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과는 첫만남이 되는 것이다.
아파트 앞에 지어진 저 작은 집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작은 구멍가게였다. 아파트주민들이 이용하는 그런 가게였다. 가만히 따지고보니 내가 어렸을때 터잡고 살았던 동네는 열댓집 정도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멍가게가 있었고 막걸리집까지 있었다. 모두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에는 작은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모두들 기를 쓰고 덤벼들었기에 생긴 현상이었으리라.
길가에 주차한 자동차 위에 꼬마 둘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남매였을까? 맑은 미소를 날려주는 그들이 너무 귀여웠다.
도로가에는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수도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과일 몇가지 달랑 차려놓고 파는 가게도 보였다.
우리는 바나조르(=바나드조르)로 이어지는 도로로 다시 올라갔다.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이 목적지를 찾는데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도로가에 만들어둔 벤치는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은듯 했다. 그 엉성함이 친근하게 느껴져 한번씩 앉아보았다.
가게에는 예쁜 빗자루가 진열되어 있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아이들은 하나같이 귀여웠다. 인형같다는 표현은 서양아이들을 두고 쓰는 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길가 어떤 가게에서는 옷을 팔고있었다. 평소에 느끼는 것이지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외복 하나만큼은 아웃도어 상품으로 기가 막히게 잘 차려입는다. 출퇴근시에 입는 옷차림새도 지구위 어느 나라에 가져다 두어도 빠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옷이라는게 그렇다. 잘 차려입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차려입는 경우도 있고 국민 모두가 한결같이 다 가난해서 입을 옷조차 없는 나라에서는 패션감각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제법 세련된 티를 내고 산다. 이런 것이 아마 문화수준일지도 모른다.
햇빛에 물기를 말려가는 빨래를 보면 남루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아니한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나라가 아르메니아였다.
한번씩은 마슈르트카가 지나갔다. 산에 갔다가 내려올때는 한번 타 볼 수도 있겠다.
동네 전체의 행적은 남루해도 사람들은 기품을 잃지 않고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가에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저 관들은 가스관들이라고 한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제법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시설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멀리서보니 호텔같기도 하다.
아까 미니버스에서 내린 현지인이 자기집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모습을 보며 <닥터 지바고>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왜 그런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 것인지는 모른다. 이런 풍경안에는 아련한 우수와 애잔함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중국 최서부 신강의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서는 백양나무숲을 볼 때마다 그런 감정을 느꼈었다. 어쩌면 말이다, 내 가슴 제일 밑바닥에는 서글픔과 애잔함이 가득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건장한 사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길가 수도에 코를 박고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사내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버스정류장의 모습을 찍어두었다. 내 가슴 한구석도 텅 빈듯 했다.
중국 중소도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광경을 아르메니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웅장함과 거대한 속에 스며든 초라함이라니.....
이제 어느 정도 걸어온 듯 하다. 바나드조르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산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여긴 새로 개발하는 리조트인가보다. 거대자본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진 것 없는 없는 서민이 흉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만 여기에는 누가 큰 돈을 대어 리조트를 만들어나가는가보다.
도로가에 있는 집들은 하나같이 오래되어 남루하기만 했다.
마침내 우리들은 메인 도로에서 벗어나 산골로 이어지는 낡은 길을 따라 걷게 되었다. 저만치 앞에서 골짜기를 가로지른 시설은 아무리봐도 기찻길 같다.
그래, 기찻길이 맞았다. 그런데 말이다, 그때쯤 비로소 한가지 퍼뜩 깨달은 것은 내가 물을 준비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알고보니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물을 챙겨오는 것을 잊어먹었던 것이다.
뜨거운 여름날, 산길을 간다는 사람들이 물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참 우리 팀도 너무 엉성하기만 하다. 갑자기 목이 심하게 말라오기 시작했다.
큰 도로가에서는 자주 보였던 구멍가게도 이 신골에서는 찾을 길이 없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이라도 찾아야하지만 찾아낸다고 해도 낯선 나라의 개울물을 함부로 마구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갑자기 우리들 모두가 너무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맥이 탁 풀리면서, 즐거워야 할 산행길이 목마름에 지쳐 기력이 소진되는 비극을 맞아 서글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길을 걸으면서 보니 어떤 집 마당에서는 깎은 양털을 햇살에 널어 말리는 모습을 만날 수도 있었다. 어디에선가 아이들이 재미있게 물장구치며 노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너무 목이 말라 고통을 받던 우리들 가운데 결국은 두사람이 특공대원이 되어 배낭 속에서 빈물통을 꺼내들고는 민가로 물을 구하러 갔다. 두 사람을 보내두고 나는 도로를 따라 상류쪽으로 걷고 있는데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물을 얻어마시기 위해 들어간 집에서 집안 어른격인 할아버지가 커피와 과자를 내어놓고 같이 온 사람들도 함께 와서 먹고 마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다 있는가 싶었다. 터키 동부 아라랏산 부근 산골에서도 그런 경험을 한적이 있었는데 여기 아르메니아의 험한 산골짝에서 다시 그런 유쾌한 일을 겪는 것이다.
인상 좋아보이는 할아버지는 며느리를 시켜 다과를 내어오게 했다.
졸지에 우리도 커피를 한잔 얻어마시게 되었다.
어디 그것 뿐이었으랴? 입에 넣으면 살살 녹기 시작하는 아르메니아 과자까지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배낭안에서 캔디와 과자를 꺼내 손자손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까 물놀이 소리를 내던 아이들은 알고보니 이 집의 손자손녀였다.
할아버지는 얼음이 들어있는 페트병에 찬물을 가득 담아서 건네주셨다. 이런 따뜻한 인심이 고마워서 결국 나는 배낭속에 가지고 있던 K2회사 제품인 깔개를 할머니께 선물로 드리고, 필통속에서는 새 볼펜을 꺼내 손자에게 선물로 주었다. 일행중 다른 한분은 그분이 가지고 있던 볼편을 꺼내 손녀에게 주었고.....
이런 모습을 보시던 할머니께서는 결국 눈물을 훔치셨다. 그렇다. 여행자는 이런 작은 인심에 감복하는 것이다. 웅장하고 찬란한 멋진 풍경보다 화려하고 재미난 시설보다 더 감동을 주는 것은 진솔한 모습에서우러나는 따뜻함과 친절이다. 그런 행동이 나그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서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돌아나올 때 온 가족이 다 나와 배웅해주었다. 아르메니아! 착한 사람들이 사는 멋진 나라였다. 나는 반드시 다시 가 볼 생각이다. 다음에는 신록이 움트는 5월경에 가볼 예정이다. 높은 산에 눈이 가득 남아있는 환상적인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 싶기도 하지만 가슴 따뜻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댁을 나온 뒤 우리는 피로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골 도로를 걸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따뜻함과 정겨움이 가득한 시골풍경이 나그네의 마음에 온기를 더해 주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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