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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강남 6대고진 - 주장 3

by 깜쌤 2015. 6. 30.

혼자서 능숙하게 배를 젓는 사공들 가운데는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장을 두고 인공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고 말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운하와 다리가 보이는 참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을 겸한 국수를 시켰습니다. 

 

 

제 여행기를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아침은 중국전통식으로 간단히 먹는 날이 많고 점심은 국수종류로 간단히 떼우며 저녁은 약간 푸짐하게 먹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나는 깨끗하게 다 비웠습니다. 접시의 왼쪽상단과 오른쪽 하단을 보면 깨진 부분이 있는데 그런 접시에 음식이 담겨 나오더라도  절대 기분나빠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중국인들에게-특히 음식점을 하는 분들에게는-그게 자기 음식점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표시가 되기도 합니다. 자부심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말과 통합니다.  

 

 

음식을 먹었으니 이제 다시 힘을 내서 둘러봐야지요.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엽초창 고거라는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엽초창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듣는 이름입니다. 

 

 

이 글을 쓰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중화민국 초기에 활약햤던 정치가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남사백년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서점 비슷한 공간이 있더군요.

 

 

중국 근대사를 살펴본 결과 손문이 주도했던 1924년의 제 1차  중국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 선언문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부 관광객들은 입구 대청공간의 손님접대용 의자같은 곳에 앉아보기도 했습니다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남의 나라까지 가서 꼴사납게 보이는 행동은 하지 않는게 도리이니까요.

 

 

1월 24일임에도 불구하고 강남에는 봄기운이 완연했습니다. 

 

 

 엽초창같은 정도의 거물이면 시시한 규모를 가진 집에 살았을 리가 없습니다. 집이 꽤나 큰편에 속하더군요.

 

 

나는 안으로 더 들어가보았습니다.

 

 

저택의 한공간을 이용하여 간단한 휴식공간을 겸한 매장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이름하여 '남사백년서원'입니다.

 

 

책도 볼 수 있고 차도 마실 수 있는 그런 공간이더군요.

 

 

차한잔도 마시지 않고 다시 돌아나왔습니다.

 

 

운하 인근의 골목을 살펴보았더니 작은 객잔이 곱게 숨어있었습니다.

 

 

이름도 예쁩니다. "매화객잔"!

 

 

부부라고 여겨지는 사공내외는 식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나면 손님을 모시러 가겠지요.

 

 

나는 운하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가며 문을 열어둔 가게를 기웃거렸습니다. 엿가게를 지나갑니다.

 

 

가위로 엿을 자르는 솜씨가 얼마나 능숙한지 모릅니다.

 

 

화려한 큰거리보다는 뒷골목을 찬찬히 살펴보면 서민들의 신산한 삶이 피곤한 숨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뒷골목 탐방을 즐깁니다.

 

 

운하와 골목을 구별짓는 난간의 돌기둥이 운하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돌기둥에 구멍을 내고 대나무 장대를 끼워 난간을 대신했네요. 

 

 

가정집에서 운하쪽으로 계단을 내어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한 아이디어가 놀랍기만 합니다.

 

 

골목을 끼고 도는 물길에는 꼭 다리를 놓았습니다. 다리를 만들때 높이를 높여 작은 배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풍광이 주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골목을 지나다가 나는 멋진 커피가게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거긴 나중에 들어가볼 생각입니다.

 

 

다리를 넘어갔더니 또 다른 골목길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골목에는 작은 가게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더군요. 예쁜 가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주점도 있고 기념품 가게들도 있고......

 

 

운하위에 만든 건물에서 밖을 내다보는 광경은 운치가 넘쳐흐릅니다. 

 

 

아치형으로 만든 돌다리가 꿈속에서 만나보는 풍경마냥 슬며시 다가왔다가 사라져갑니다.

 

 

이 부근에서 배를 탈 수 있는가 봅니다.

 

 

어떤 건물들은 나무로 만든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들은 심청(沈廳)을 찾았습니다. 효녀 심청이 아닌 심씨가 살았던 엄청난 큰 집으로서의 심청입니다.

 

 

주장까지 왔으면 심청이나 장청 정도는 보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골목위를 가로질러 집과 집을 이어주는 통로를 만들 생각은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한쪽은 운하! 한쪽은 골목, 그리고 그 맞은 편은 거대한 부를 쌓았던 거부의 저택!

 

 

나중에 우리들은 맞은편에 보이는 2층건물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게 됩니다. 그 부근에 있는  다리가 쌍교일 것입니다. 주장 풍광의 백미가 쌍교입니다.

 

 

많은 배들이 부근을 지나더군요. 명소중의 명소이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쌍교옆에 자리잡은 커피숍은 나중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한참동안은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배를 타보지 않은 것이 이제와서 비로소 후회스럽네요.

 

 

우리는 심청에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중국역사에서 원말명초의 격변기에 강남제일의 부자로 소문났던 이가 심만삼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저택이 심청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일설에는 그의 후손들이 나중에 이 저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심만삼(沈萬三)은 1317년에 태어나 1372년에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던 어수선한 혼란기였습니다. 그는 사업을 통해 돈을 모았다고 전합니다. 원나라가 망하고 중국이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을때인데 한때는 나중에 명태조가 되는 주원장의 숙적이었던 장사성을 편들기도 했습니다. 

 

 

천하의 거부였으니 역시의 혼란기에 처신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만삼이 노년기에 여기서 살았다고 합니다만 그가 운남지방에서 사망한 것을 가지고 판단해보면 쫒겨가기 전에 여기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택 한쪽 벽면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심만삼이 관계된 여러가지 일화들이 동판벽화로 제작되어 부착되어있었습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오늘날의 남경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한때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장사성을 지원했던 심만삼은 명태조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거금을 들여 남경성의 성벽을 쌓아주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관계회복에는 실패합니다.

 

 

동판화에는 그런 내용들이 자세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력을 이겨낼 재력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고 나서는 정치권력의 수명은 짧고 재력의 수명은 긴것이 인간세상의 속성이기에 요즘은 재력이 더 오래가는듯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록펠러가문의 번영을 보면 확실히 증명됩니다. 중국이라고 예외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지금 시대의 일이고 권력이 대물림되던 제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심만삼은 엄청난 부를 잃고 운남성으로 쫒겨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판화 앞에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며 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번자로 기록된 내용이기에 정확하게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중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주원장의 흔적은 강남지방 여러 곳에 남아있더군요. 이번 여행을 통해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살펴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남제일의 부자였기에 이런 저택을 만들어서 살 수 있었던가 봅니다. 이 건물은 명나라시대의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심청 부근에 장청이 있는데 장청에는 들어가보지 않았습니다.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한군데를 구경하고 나면 또 다른 방이 등장하는 식이었습니다.

 

 

모두들 심만삼처럼 부자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엽전을 흉내내어 만든 문을 한번씩은 통과해보려고 노력하더군요. 

 

 

초록색 떡을 만들어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때가 아니면 잘 먹지않는 사람이지만 두어개를 사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예전에 주방으로 쓰던 공간을 활용하여 떡을 만들어 파는 모양입니다.

 

 

달콤한 맛이 나는 초록색 떡이 모처럼 나그네의 입맛을 살려주었습니다.

 

 

술도 팝니다.

 

 

심청을 보며 부자들의 삶을 슬쩍 엿볼 수 있었습니다만 진멱목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역부족이었습니다.

 

 

제가 중국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봅니다.

 

 

건물 다른 곳에도 동판벽화를 제작해서 붙여두었더군요. 여기에는 심만삼과 장사성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출구를 찾아 걸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사람들로 들끓는 골목이 됩니다. '성명제시'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름으로 시를 지어준다는 말이겠지요?

 

 

골목에는 음식점도 있고.....

 

 

주전부리를 즐길 수 있는 가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걸었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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