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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중국 병원에서 엑스레이 사진까지 찍었습니다만......

by 깜쌤 2015. 3. 24.

 

일행 한분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2층계단에서 1층 바닥으로 첫걸음을 내딛다가 바닥에 있는 물기때문에 미끄러지고 만 것이죠. 체격도 당당하고 인성이 워낙 좋은 분이라 우리 팀의 기둥격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면서 발목 부분에 부상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사고를 당한 본인의 느낌상으로 발목이 골절당한 것 같다고 말씀을 하시길래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바닥 물청소를 했던 가게 주인은 미안한 마음에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디에선가 스프레이를 구해와서 발목에 뿌렸습니다. 처음에는 겹지른 줄 알고 발목을 흔들기도 했습니다만 환자와 우리들이 나서서 말렸습니다. 발목부분이 부러졌다면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요? 말도 잘 안통하는 남의 나라 중국에서, 더구나 이 깊은 산중에서 이런 큰 일을 당했으니 어떻게든 해결책을 강구해내야만 했습니다. 의논끝에 이 산중에 큰 병원이 있을리가 없으니 일단 장가계시까지 나가보기로 했습니다.

 

환자가 발생했을 때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환자본인의 판단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나는 이번 여행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며 여기까지 함께 해준 환자와 동료의 결정을 믿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이야 인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산전수전에다가 공중전까지 다 겪은 노장들이니 본인의 판단이 더 가치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환자의 배낭을 동료가 대신 메고 함께 부축해서 버스정류장까지 애써서 걸어갔습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시간마다 있었기에 우리는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무릉원 입구쪽을 거쳐 시내로 나가는 것이었기에 쉽게 장가계시내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삼림공원으로 들어올 때처럼 높은 산을 넘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버스 안에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골절같은 한자낱말을 찾아서 미리 한문으로 된 문장을 작성해두었습니다.

 

장가계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온 우리들은 터미널 안에 있는 물품보관소에 큰배낭을 맡겼습니다.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같은 곳에는 어디든지 짐을 맡아주는 곳이 있는 법이므로 큰 배낭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해두어야만 움직이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요금은 하루에 10원이었습니다. 영수증을 받아 챙긴 뒤 밖으로 나가 택시를 찾았습니다. 택시 정류장에 근무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미리 준비해둔 메모지를 보여주며 물어본 결과 가장 큰 병원은 시내에 있는 인민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경찰은 6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택시 승강장에는 택시 두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앞에 서있던 택시의 운전기사는 우리를 태우고 인민병원에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장거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외국인 환자의 응급상황을 보면서도 매정하게 거절하는 그가 얄미워지더군요. 이런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뒤차 운전기사는 기꺼이 인민병원에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남의 불행을 빤히 보면서도 거절하는 앞쪽 택시기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안봐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인민병원은 장가계시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습니다. 병원까지의 요금은 10원이 나왔지만 나는 운전기사에게 팁을 겸해서 조금의 웃돈격인 5원을 더 얹어주었습니다. 그는 그돈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진심으로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더군요. 이제 중국병원에서 엑스레이촬영을 해서 발목의 상태를 알아본 뒤 치료를 해야합니다. 우리가 중국어가 안되니 말이 안통하는 상황이지만 어떻게 하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1층 입구에 있는 안내소에 가서 골절이라고 써둔 메모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안내원은 2(루) 206(호)라고 써주었습니다. 2층 206호라는 말이겠지요. 같이 간 동료와 함께 환자를 부축해서 2층 그 호수로 찾아가보았더니 복통을 치료하는 내과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싶어서 다음 진찰실인 208호를 살폈더니 골과(骨科)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러면 그렇지 싶었습니다.

 

 

문진을 끝낸 중국인 환자가 나오자 우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메모지를 꺼내보였습니다. 친구가 골절을 당했기에 기본치료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중국인 의사는 영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자는 알아보더군요. 환자의 상태를 보여주고 엑스레이라고 영어로 써서 보여준 것이 그나마 쉽게 통해서 촬영소견을 받아냈습니다. 담당의사는 진복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는데 퉁명스럽고 거칠었습니다.

 

 

한국같으면 틀림없이 병원문을 닫게할 그런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의사의 소견서를 들고 우리는 엑스레이 촬영실이 있는 1층 구석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바람에 동료와 환자분이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저 미안함과 송구스러움뿐입니다.    

 

 

엑스선 촬영을 하기위해서는 접수를 하고 돈을 내어야한다는 사실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냥은 안찍어줄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환자들을 보았더니 플라스틱 카드같은 들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게 없었습니다. 어디서 발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접수를 어디에서 하는지조차 몰라서 정말 난감해졌습니다.

 

1층 X-ray 실에 가서 의사의 소견서를 보여주었더니 담당 아가씨는 한자로 교비(交費)라고 써서 보여줍니다. 돈을 내고 오라는 말이겠지요? 문제는 돈을 어디에 가서 어떻게 내는 것인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따라가면서 할머니의 팔에 찬 완장을 보았더니 우리나라로 치면 그 할머니가 자원봉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층 복도 끝머리까지 가서 창구에 등록을 하고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플라스틱 카드를 만들어주더군요. 마침내 우리도 중국환자들처럼 등록을 하고 카드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엑스선 촬영을 하러 가야했습니다. 

 

 

우리에게 지정된 1층 3호 방사능실 앞에는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편리를 봐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우리도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제한몸 아파서 온 사람들이니 1분이라도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그런 처지를 빤히 아는지라 우리가 외국인임을 내세워 미리 촬영할 수 있도록 편리를 봐달라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삼십여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 안으로 들어가서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실 분위기야 우리나라의 70년대 모습이니 말해서 무얼하겠습니까? 촬영을 끝내자 벌써 11시 반정도가 되었습니다. 촬영실 아가씨는 삼십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결과물이 필름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정도가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던터라 우리는 진찰실로 올라가서 30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2층 208호실에 가보았더니 문이 잠겨져있었습니다.

 

 

얼마후에 의사가 다른 손님과 함께 나타나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촬영한지 30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니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말을 하려고 했더니 의사 진복천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직 필름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친절이나 봉사같은 개념은 머리속에 자리잡지 못한 전형적인 관료적인 냄새가 풍기는 의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잘못이라기 보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살면서 엘리트의식에 젖어 살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불쌍해지기도 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우리를 불러주지 않으니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시 진지하게 의논을 했습니다. 의논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엑스선 촬영결과를 보지않고 1분1초라도 빨리 장사시로 돌아가서 비행기표를 구해서 가능한 한 내일 아침에 환자분만 조기귀국시키기로 했습니다. 환자가 귀국의사를 밝혔으니 이제는 병원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1층으로 내려온 우리는 택시를 타고 다시 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나는 택시속에서 온갖 경우의 수를 두고 계산을 했습니다.     

 

 

귀국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서는 근무시간이 끝나기전에 장사시로 속히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장가계시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장사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했습니다. 장사에서는 어디에서 어떻게 비행기표를 구할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비행기표를 판매하는 항공사 위치도 알아야하고 오늘 밤을 어디에서 묵어야할지도 고려해야했으니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장가계에서 장사까지 4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장가계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장사행 버스시간표를 확인했더니 1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벌써 한시 15분이 넘어서고 있었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달랑 13분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버스 차표를 석장 구해놓은 뒤 짐을 찾으러 갔습니다.    

 

보통 때라면 10분이야 엄청 긴 시간이지만 지금은 발목이 부러진 환자가 동행하고 있으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짐을 돌려받은 뒤 허겁지겁 버스승강장을 찾아서 는 부리나케 서둘러서 개찰을 받고나갔습니다. 짐칸에 짐을 싣고 나서 얼마안있자 버스가 곧 출발했습니다. 참으로 길고긴 날이었습니다.

 

이제는 귀국할 비행기표 문제를 해결해야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할인항공권인데 1월 28 일에 귀국하기로 약정된 표입니다. 할인항공권이라는 것이 정해진 날짜 전이나 후로는 사용할 수 없는 비행기표이니 환자가 귀국하기 위해서는 비행기표를 다시 끊어야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장사시내에 도착하면 아무래도 6시가 넘을 것이니 항공사나 여행사들이 문을 닫을게 뻔합니다. 어떻게할까 하고 고민중인데 환자분이 멋진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우리가 비자를 받은 경주시내의 여행사에 전화를 해서 한국에서 장사를 출발하여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구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죠.

 

환자와 나는 즉시 한국에 있는 교회의 동료 장로에게 연락했습니다. 다행하게도 연락이 되었기에 지금 즉시 경주시내에 있는 @@여행사에 전화를 해서 무슨무슨 과장님을 찾은 뒤 중국 장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구하되 돈 액수는 신경쓰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귀국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스마트폰으로 아시아나 항공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비행기표 구매를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예약이 되질 않았습니다.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서너번의 국제전화 통화를 해야했는데 우리가 출발할 때 데이터 무제한 사용서비스에 가입해둔터라 카톡으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국제전화가 무료가 되므로 요금을 추가로 부담할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한시간쯤 뒤에 표를 구했다는 연락이 왔기에 체크인을 할때 필요할지 모르니 증거물을 첨부해서 카톡으로 보내달라고 다시 당부를 했습니다. 

 

내일 아침 9시에 장사를 출발해서 인천으로 가는 중국남방항공의 비행기표를 구했으므로 큰 문제 하나는 해결한 셈입니다. 한국의 여행사에서  우리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침 9시 비행기라면 호텔에서는 7시에 나서야합니다. 그 새벽에 택시를 타려면 그것도 문제가 되므로 이번에는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버스가 출발하는 호텔에 방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려면 공항행 리무진이 출발하는 호텔까지 찾아가야만 합니다. 환자가 있으니 꼭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그런 조건에 맞는 호텔을 찾아냈습니다. 장사역 부근에 있는 민항대주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장사시에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제법 많은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버스표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버스 도착장소가 장사기차역 부근의 터미널이 아니고 장사서기차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출발했던 장사기차역 인근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라면 장사서기차참(=장사서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로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해결해야할 일이 계속 등장했던 것이죠. 나는 서서히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속에서도 꿋꿋하게 참아주신 동행자분께 거듭 거듭 머리숙여 송구스러움과 미안함을 아룀과 동시에,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바칩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