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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4 일본-오사카, 교토 외(完)

오사카성 1

by 깜쌤 2014. 10. 31.

비장미(悲壯美)! 비장하다는 말은 인간에게 묘한 매력을 끌어들이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듯 하다. 비장미는 낱말뜻 그대로 '슬픔가운데 스며있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나는 일본의 성들을 볼때마다 그런 비장미를 느낀다. 홍콩에서 제작된 갱스터 느와르 영화들이 관객에게 주는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성을 제대로 알고 감상하는데는 필연적으로 사무라이들이 남긴 이야기나 사연들이 등장하게 되므로 사무라이의 삶을 알아두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오사카성에 얽힌 인물로는 단연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 두사람이다. 물론 그들은 사무라이 계급이 아니다. 그 둘의 이야기를 알면 오사카성 구경이 한층 재미있다. 참고로 할만한 책으로는 <대망 大望> 정도가 어떨까 싶다. 워낙 긴 이야기여서 인내심을 가지고 덤벼들어야 할 책이긴 하지만 읽어볼만한 가치는 있다. 특히 그대가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히데요시나 이에야스는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지휘했던 다이묘들이었다. 이에야스는 어렸을때부터 무장의 집안에 출생한 신분을 지녔으니 그렇긴해도 히데요시는 최하층으로 여겨질만한 미천한 계급 출신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시장에서 바늘장수를 하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자로는 직전신장으로 쓰는 오다 노부나가는 풍운아중의 풍운아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서는 위에서 말한 비장미가 느껴진다. 배신을 한 부하장수에게 자기 시신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화약창고에 불을 지르게하고 함께 폭사해버렸으니까 말이다.

 

 

오사카 성을 이야기할때 히데요시를 빠뜨리면 재미없어진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오사카성은 나중에 이에야스가 손을 본 후의 모습이다. 원래는 이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고 한다.

 

 

오사카성의 규모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작은 읍성 정도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히데요시의 정치적인 중심지가 교토였다면 그가 권력을 획득하고 난 뒤의 중심지는 단연 오사카다. 오사카성도 히데요시가 축성했다. 지금 남아있는 성은 나중에 이에야스가 규모를 훨씬 줄여 고쳐쌓은 것이다. 

 

 

이 정도의 성을 쌓으려면 상상을 넘어서는 경제력과 절대권력이 필요했으리라. 히데요시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절대 권력을 지녔었다. 마음대로 못한 인물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권력을 사용해서 전국에 널린 다이묘들을 쥐어짜면 엄청난 규모의 축성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올 원망이나 배신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경제력은?

 

 

오사카와와 남쪽으로 맞댄 도시가 사카이다. 사카이는 예전부터 상업중심지로 유명했다. 

 

 

히데요시는 전국을 활동무대로 하여 상권을 쥐고 있던 교토의 상인들과 오우미, 이세의 상인, 그리고 오사카와 사카이의 상인들을 오사카로 불러들여 한곳에 모여 살게했다. 지금도 오사카는 상인들의 도시며 음식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오사카 사람들에게 히데요시의 인기는 절대적이라고 한다. 왜 그럴가? 

 

 

 

오늘날의 오사카를 만든 사람이 히데요시기 때문이다. 위에서 사카이라는 지명을 슬며시 들고 나왔었는데 오사카 바로 밑에 자리잡은 시가 사카이다. 사카이 상인들은 예로부터 일본인들이 알아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개성상인을 알아주었듯이.....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뜬다.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사카성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노란색 점들은 우리들의 이동경로를 의미한다. 옥색점이 직혀져 있는 곳이 히데요시를 떠받드는 신사다.

 

 

사진을 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오사카 성의 해자는 넓고 크고 깊다. 이런 정도면 적이 함부로 건널 수도 업고 메울 수도 없다. 성이 자리잡은 위치도 절묘하다. 해자에 물을 채우려면 엄청난 수량이 필요하겠지만 히데요시의 명을 받든 기술자들은 간단하게 해결했다. 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요도가와의 물을 해자로 끌어들인 것이다.

 

 

더구나 해자가 두겹으로 되어 있다. 성벽도 두텁고 높은데다가 해자까지 겹으로 된 성이니 난공불락을 자랑하는게 당연하다.

 

 

히데요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이지만 결국은 그의 숙적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일가들은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몰락하지만 히데요시가 남긴 업적은 살아남았다. 

 

 

혹시 오사카의 상인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 글상자의 글을 참고로 해보기 바란다. 글을 통해서 배울게 엄청 많다고 본다.

 

 

 

 

히데요시 가문이 멸망하고 난 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오사카는 권력과 실권을 에도로 넘겨야만 했다. 에도가 바로 오늘날의 토쿄다. 에도를 수도로 삼고 일본을 통치해나간 집안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이다.

 

 

일본 성들의 상징은 천수각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천수각과 성벽이 성의 가치를 결정한다고나 할까? 

 

 

우리는 해자밖에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와서 이제 내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중이다.

 

 

내성과 외성사이의 해자 가운데 일부구역에는 물이 없었다.

 

 

부러 메꾸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는 정문 앞에 풍국신사가 있다.

 

 

우리는 풍국신사쪽으로 가보았다. 도리이가 보였다.

 

 

히데요시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성씨가 토요토미다. 토요토미를 한자로 쓰면 풍신(豊臣)이 된다. 그래서 신사이름도 풍국신사인가보다. 

 

 

풍국신사 앞에 히데요시의 상이 서 있다. 대() 위에 올라선 일본 무장의 차림이다.

 

 

신사의 입구격인 도리이가 하늘로 치솟았고 도리이 기둥 양쪽에는 히데요시 가문의 문장이 보인다.

 

 

오동나무와 꽃을 형상화한 문장이다. 전국시대를 풍미한 어지간한 다이묘들은 나름대로 각종 양식의 문장을 디자인해서 사용했다. 다이묘가 아니더라도 사용한 예가 많긴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신사건물은 도리이 안쪽에 자리잡았다.

 

 

지금 일본에서는 재팬시리즈 챔피언전이 한창이다. 한신 타이거즈에 소속된 오승환이 큐슈의 후쿠오카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소프트뱅크 팀과 벌인 4차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맞아 1승 3패(2014년 10월 30일 현재)로 몰리고 있는 중인데 한신 타이거즈의 근거지가 바로 오사카다.  

 

 

그 오사카의 핵심인물이 히데요시고.....

 

 

히데요시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를 보고 '대머리 쥐'니 '원숭이'니 해가며 놀렸다는 것으로 보아 그는 결코 잘생긴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일화를 바탕으로 해서 견주어 본다면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잘 만든 히데요시의 동상이다.

 

 

히데요시를 모신 신사는 오사카성의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맞은 편에 있다. 

 

 

우리가 아무리 히데요시라는 인간을 경멸한다고 해도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그가 위대한 인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다.

 

 

이런 역사의 평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우리 일행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