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척리 고분군옆으로 난 골목길을 달렸다. 일부러 국도로 나가서 달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시골길이라고 하는게 빤해서 어디로든지 연결되게 되어있고 거기가 거기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금척리 고분군에는 개망초꽃들이 가득했다. 봉분은 그런대로 손질을 해서 깔끔했지만 바닥은 풀로 덮혀서 보기가 흉했다. 언제쯤 여기도 깔끔하게 단장해둘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마을 안길을 달리다가 나는 결국 다시 국도로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달리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그래도 경주와 영천을 잇는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외곽으로 개통되어 있어서 예전부터 쓰던 국도의 통행량은 훨씬 줄어든 상태다.
경주와 포항을 잇는 고속철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나는 고속철도용 콘크리트 교각 밑을 지났다. 이제 목월생가부근까지 다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생가 주차장이다.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박목월과 조지훈, 그리고 박두진 세 시인을 합쳐서 우리는 청록파시인이라고 부른다. 박목월과 조지훈은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시인의 제자들이다. 정지용은 독설과 기지로 유명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휘문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했고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지훈과 목월의 입장에서 볼때 정지용이 시로서는 스승이었다. 정지용의 소개로 조지훈과 박목월이 1940년에 경주역에서 역사적인 대면을 했다고 전해진다. 경주역 영업이 1918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니 경주역에서 박목월과 조지훈이 처음 만났다고 하는 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목월선생의 생가 주차장에서 보면 신경주와 포항을 연결하는 고속철도선이 벌판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는 작년에 와보고 처음 찾아온다. 작년에도 한여름에 찾아왔었다.
오후 대여섯시경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내린 조지훈에게는 박목월이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조지훈은 역앞을 두리번거리다가 하얀천에 박목월(朴木月)이라는 한자이름을 쓴 깃발을 부여잡고 서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고 전해진다.
경주역앞 광장에다가 깃발을 든 박목월 선생의 동상을 세워두면 어떨까?
하다못해 기념관에 그런 모습 하나 서있었으면 좋겠다.
그날 처음 만난 두 시인은 불국사를 거쳐 석굴암에 올라가서 술잔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말이다, 뜬금없이 김동리와 박목월 선생의 기념관이 불국사 입구에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내 견문이 짧은 탓이라고해도 나는 그런 위치선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와 동시에 생가에 비치해둔 몇장의 사진 자료로 땜질을 하려는듯한 이런 발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을 것 같은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갔지만 아직도 주위공간에 대한 마무리 공사가 덜끝난듯한 모습을 보며 나는 할말을 잃었다.
도대체 뭘하자는 것일까? 작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는 생가 주위가 올해도 공사중이고 마당에 전선이 이리저리 깔려있다면 해도 너무한 것이다.
복원주체인 경주시에서는 탐방객들에게 뭘 보여주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조지훈과 박목월이 다시 만난 것은 광복이 되던해였다고 전해진다. 주간소학생 잡지사에 근무하던 박두진의 전보연락을 받고 박목월이 상경하여 박두진을 만난 후, 그날 저녁 성북동의 조지훈 선생의 집을 찾아감으로서 두 사람간의 해후가 다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렇게 만난 세사람이 의기투합한 공동으로 낸 시집이 <청록집>이다.
박목월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박두진과 조지훈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세사람 사이의 에피소드를 발굴하면 멋진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질 것이지만 관련기관에서는 너무 관심이 없는듯 하다. 어쩌면 그게 행정당국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박목월 선생의 로맨스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까지 있었던 박목월이 어떤 아가씨와 눈이 맞아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 이야기 말이다. 목월선생 부인의 너그러운 처사로 인해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갔고 아가씨도 자기 갈 길을 갔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흐른뒤 그들은 해후했다고 전해진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 박목월이 여인의 집을 방문하여 차한잔을 얻어마시고 돌아나온 일이 있었다는데.....
그때의 감정을 적은 시가 <이별의 노래>라고 전해진다. 가사를 쓴 이가 박목월선생이고 김성태선생이 곡을 붙였다. 나도 학창시절에 한번씩 불렀던 가곡이다.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목월 선생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은 워낙 유명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얼추 알고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목월 생가에 선생이 노랫말을 쓴 노래라도 틀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참 답답한 일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어놓은 생가를 아직도 황량한 느낌이 들도록 이런 식으로 만들어두고 방치하듯이 던져두는게 과연 옳은 일일까싶다.
목월은 서정성이 강한 시를 많이 쓴 분이다. 생가에도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나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꽃들을 찾아내어 더 많이 심어두고 생가구역인근 정비도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괜스레 짜증이 났다.
나는 마을 구판장에 가서 콜라를 한병 사서 콸콸 들이켰다.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해듣기로는 목월선생의 진짜 생가도 지금 만들어둔 거기가 아니고 마을 안쪽에 있었다고 한다는데........
나는 다시 시내를 향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남산을 왼쪽 뒤로 두고 들길을 달렸다.
괜히 마음이 허했다. 좋은 자료를 두고도 관광자원화할 줄 모르는 당국의 어설픈 접근이, 마냥 어리바리하기 그지없는 나같은 시골뜨기의 마음까지도 아리게 만들었던 여름날 오후였다.
(글 뒤에 붙이는 어리버리의 표준말은 어리바리입니다. 글 속에서는 그렇게 썼습니다만 서명 비슷하게 제일 뒤에 붙일때는 다시 어리버리라고 표기했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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