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정원같은 곳에 길을 만들때 직선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은 잡귀신들이 좋아하는 길이란다. 밀물이 되어 물이 차면 이 길도 꽤나 운치가 있지 싶다.
지난번 글에서는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이 역사에 등장하는 사연을 이야기했다.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정지룡은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곳 하문 출신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마카오에서 큰아버지밑에 들어가 일을 했다는데 그때부터 장사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고한다. 덕분에 포르투갈 상인들 눈에 띄어 세례를 받아 니콜라스 가스발드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연고로 포르투갈 상사(商社)의 중개인이 되어 스무살 부근에 일본의 히라도를 방문하게 되었고 이때 처음 리탄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리탄에게는 친아들이 있었지만 정지룡의 뛰어난 재치와 협상술에 매료되어 그를 점찍은 뒤 하문 앞바다에 떠있는 섬들인 팽호군도에 초대했다. 당연히 팽호군도는 리탄의 근거지였다. 그 팽호군도를 네덜란드 측에서는 영유하기를 원했고 정지룡은 리탄과 함께 북경까지 가서 정부와 협상을 하게되었다.
1625년 8월에 리탄이 고령으로 쓰러지게 되자 리탄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리탄의 아들을 제거한 후에는 조직을 접수하게 된다. 정지룡이 중요인물로 떠오르게 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귀순하기를 권고했지만 정지룡은 명나라 조정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동안 화교출신 거상(巨商)들이 명나라 조정에 의해 어떤 식으로 제거되는지를 눈여겨 본 결과였다.
그로부터 2년뒤인 1627년, 정지룡은 자기 휘하의 함대를 거느리고 하문에 쳐들어가 일대를 점령하고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복건지방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일반이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교묘함과 뛰어난 처세술을 지닌 인물이 정지룡이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그는 훗날 그는 해적을 진압하는 제독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그는 본격적인 실력을 발휘하여 동남아시와 인도양의 무역을 독점하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마카오와 일본의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포르투갈 상인과도 협력하고 대만의 네덜란드 세력과 마닐라의 스페인상인들과도 손이 닿는 국제적인 거물이 된 것이다.
1640년경이 되자 만주에서 힘을 길러 신흥세력으로 대두한 여진족들이 세운 청나라는 본격적인 대륙침략에 나서게 된다. 교활한 정지룡은 대륙에서의 세력 변화를 예민하게 읽어내고 비밀리에 만주족과 협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청의 힘에 밀려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온 명나라는 정지룡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관직을 준 뒤 청나라 군대에 저항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정지룡은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자란 끈질긴 잡초처럼 생존을 위한 치밀하고도 교묘한 처신을 하게 된다.
정지룡은 살아남기 위해 청나라에 투항할 마음을 굳힌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반대한 인물이 바로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다. 이제 본격적인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정성공은 스물두살의 한창 나이때 아버지를 따라 강남으로 쫒겨온 명나라 황제 융무제를 만난 적이 있는데 황제는 정성공의 걸출한 모습에 반해 명나라 황제 집안의 성인 주(朱)씨 성을 하사했다.
그때부터 그는 사람들에게 국성야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성야(國姓爺)란 명나라 황제의 성을 가진 지도자 혹은 영주라는 뜻이다. 국성야라는 발음을 유럽상인들은 코싱가라고 불렀다. 정성공이 코싱가로 알려진 연유가 그런데 있다.
교활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정성공은 황제에게 청나라 군사를 물리칠 묘책을 진언했고 황제는 그에게 군사지휘권을 맡기게 된다. 청과 내통하고 있던 아버지 정지룡은 아들이 거느린 군대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방해했고.......
결국 명나라 군대는 청의 군대에게 패퇴하였다. 미리 청나라 측과 공모한대로 아버지 정지룡은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약속과는 달리 시시한 관직을 받는데 그친데다 금족령(禁足令)까지 받게되자 절망하게 된다.
망해가는 명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성공은 아버지와 결별했다. 청나라의 군대가 정성공 일가의 지배처였던 복건성을 휩쓸때 그전에 이미 일본에서 복건으로 와있던 정성공의 어머니는 청나라 군대에 잡혀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를 부끄러워한 정성공의 어머니는 사무라이 집안의 후예답게 단도로 할복을 한뒤 성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최후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정성공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매국행위를 비난한 뒤 청과의 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후 정성공은 자기 집안의 개인영지나 다름없었던 복건성의 하문도와 금문도를 근거지로 하여 청나라와의 기나긴 투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한족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때 이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정통 왕조라 볼 수 없었다. 몽골민족이 세운 원나라도 마찬가지로 인식한다. 그랬기에 청과의 투쟁에 나선 정성공이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이제 정성공 석상의 모습은 지겹도록 보았으리라. 우리는 그의 석상이 마주보이는 해변의 작은 바위에 만들어둔 정자에 갔다.
그런 뒤 우리는 바다위에 만들어둔 통로를 따라 석상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석상은 참으로 절묘한 곳에 자라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는 석상을 향해 바다에서부터 조명을 비추는 모양이다. 중국인들의 스토리텔링 기법이 놀라울 정도다.
우리나라같으면 이런 식으로 길을 만들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잘찾아보면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런 인물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있으면 뭘 하는가? 써먹지를 못하니 안타까움만 가득하다. 위인이나 영웅을 단순히 돈벌이에만 이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위선양에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착안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쉽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이념과 지역감정에 따라 근현대사 인물에 대한 평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은 더더욱 서글프기만 하다.
정성공의 석상이 있는 바위로 건너가기 위해 만들어둔 통로 밑을 지났다.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듬직한 모습이다.
영웅이 왜 영웅이고 위인이 왜 위인인가? 그들 앞에 서면 어딘가 안심이 되고 고개가 숙여지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솟아나야 정상이 아니던가?
중국인들은 뭘 하나 만들어도 크게만 만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요즘은 세밀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할 줄 아는 능력까지 배워들인것 같아서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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