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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4 중국-복건성:화교의 고향(完)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의 등장

by 깜쌤 2014. 1. 29.

호월원에는 작지만 아담하면서도 깔끔한 해수욕장이 있었다. 썰물임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해변이 제법 참했다.

 

 

그 한쪽 끝에 정성공의 상이 바위 위에 턱 버티고 서있는 것이다. 위 사진에서는 나뭇가지에 가려 정성공의 석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위의 지도를 보자.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지도를 클릭해서 크게 확대시켜 놓고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지도 속에는 빨간색 점이 세개 찍혀있다. 제일 아래가 지금 우리가 여행중인 샤먼(=廈門 하문)이다. 그 다음 중간 상단의 점은 상하이(上海 상해)를 나타낸다. 상하이 밑의 노란색 점은 주산시를 나타낸다.

 

 

주산(舟山)! 주산 앞바다에는 많은 섬들이 떠있다. 이 섬들을 주산열도라고 한다. 여기는 예로부터 휘주상인들과 해적들과 왜구들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주산열도가 담고있는 역사적 가치를 모르면 명나라 역사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왜구들의 근거지라니 갑자기 무슨 소린가 하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면 참 복잡해진다.

 

정성공의 어머니가 다카와(田川)라는 성을 쓰는 일본 하급무사의 딸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도 오른쪽에 있는 점은 큐슈에 있는 히라도(平戶)라는 섬의 위치를 나타낸다. 정성공은 거기에서 1624년 8월 28일에 태어났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가 서기 1627년이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1636년이니 그의 출생연도를 우리 역사와 관련지어 보았을때 어느 시대쯤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해가 1598년이라는사실을 알면 시대적인 배경이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대만과 하문과 주산과 히라도를 왔다갔다하며 진행될 것이다.   

 

 

 

바로 위 지도에 히라도 섬의 위치를 나타내두었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어떻게하여 히라도 섬의 사무라이 집안 딸과 결혼하게 되었을까? 그런 비밀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명()나라의 대외통상정책을 이해해두어야하고 화교의 역사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수십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사실인데 역사를 보는 관점은 너무 다양해서 어느 한쪽에 너무 치우칠 경우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진보주의 사관(史觀)과 보수적인 사관의 충돌로 인한 폐해가 크다. 그런가하면 지나친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일방적인 지식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교사들을 제법 많이 보아왔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머리가 아파지니까 그만두기로 하자.

 

 

정성공의 어머니가 일본여자였으니 당연히 그의 아들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성공의 일본식 이름은 후쿠마쓰(福松)다. 하지만 정지룡의 부하들과 중국인 상인들은 그를 항상 정삼(鄭森)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붙여준 아들의 보디가드는 포르투갈 언어를 쓰는 아프리카인이었다고 하는데 그 보디가드는 전투를 시작할 때마다 '산티아고'라고 외쳤단다.

 

 

정지룡은 무엇때문에 히라도에 머물게 되었을까?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이 섬겼던 해적두목겸 거상(巨商)이 리탄이라는 인물이다. 리탄은 하문 출신의 화교다. 명나라 말기의 인물로서 필리핀의 마닐라와 몇몇 장소에 엄청난 양의 보물을 숨겨두었기에 황금산(黃金山)이 있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리탄의 활동무대는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인도네시아의 수라바야에까지 이르렀는데 주요한 항구마다 그가 운영하는 일용품 가게들이 즐비했기에 서양인 선장들은 리탄을 두고 안드리아 디티스 선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디티스(ditties)는 바늘과 실을 넣어두는 선원용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활동무대를 짐작하기 힘든다면 아래 지도를 보기로 하자.

 

 

 

빨간색 점 : 수라바야 위치 -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위치한다.

분홍색 점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 당시 스페인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노란색 점 : 리탄의 고향인 하문(샤먼) - 우리는 지금 샤먼을 여행중이다.

초록색 점 : 일본의 나가사키 -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정성공은 이 부근

                 히라도에서 출생했다.

 

우리는 리탄이라는 인물의 활동무대를 지도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게 화교로 알려진 중국인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다. 그러나 이 정도는 정화(=마삼보)라는 인물의 활동무대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인들이라고 하면 돈만 알고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되놈 정도로 얕잡아보는 성향이 있지만 진실을 알고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업신여김과 교만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죄라는 사실을 나는 이십차례 이상의 배낭여행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일본이나 중국이 세계를 호령할 때는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저력이 있는 것이다.

 

 

내가 잔소리처럼 들리는 이런 이야기를 어설프게 꺼내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눈을 넓혀주려는 뜻에서 하는 소리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상대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실력을 기르자는 것뿐이다. 하문에 가보았더니 어디어디가 좋더라는 식의 여행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싼 돈 들여서 고작 그 정도를 배우고 느끼고 돌아왔다면 여행을 왜 하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나 자신도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므로 젊은이들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잘난 척 하고자 하는 뜻으로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는 깜쌤이 젊은이들에게 드리고자 하는 말은,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안목을 넓혀두자는 것이다.    

 

 

리탄이 워낙 엄청난 거부였기에 동남아시아에서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위세를 누렸다. 그의 별명은 캡틴 차이나였다고 한다. 부하 조직원만해도 2만 6천여명 정도를 거느렸던 리탄은 마닐라에 거주하는 화교들도 모두 세력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필리핀을 통치하며 리탄에게 거액의 빚을 지고 있던 스페인 상인들은 리탄의 막대한 재산을 강탈할 목적으로 마닐라에서 의도적으로 부채(Debt)상환 연기를 요구하며 시비를 걸어 그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스페인인들의 재판정에 서야했던 리탄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스페인 함대에서 노를 젓는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페인 사람들은 마닐라 모처에 숨겨져 있던 리탄의 보물들을 찾아내어 나누어 가졌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강탈한 보물들은 금괴만 해도 4만여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부였던 것이다. 그가 소유한 재산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고 전한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조정에서는 마닐라에 환관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급파했다고 하는데 그게 서기 1603년의 일이다.

 

  

사건의 확장에 당황한 스페인인들은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 화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때 희생된 중국인들의 수는 2만4천명에서 2만 6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희생된 중국인 화교들 가운데는 복건성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리탄이 복건성 하문사람이니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복건방언을 쓰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 함대에서 노를 젓는 노역형을 살고 있던 리탄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1607년,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리탄은 그의 본부를 일본의 히라도와 자기 고향인 하문으로 옮겼다. 그가 쌓아둔 막대한 양의 황금산은 필리핀 마닐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리탄은 멋지게 재기에 성공했던 것이다.

 

하문 앞바다에 떠있는 섬들인 팽호군도의 영유권에 관한 네덜란드 상인들의 부탁을 받고, 리탄은 명나라 조정과 협상을 하기 위해 본토로 향했는데 그때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