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전통을 빚어내는 옹기마을을 찾아가다 3

by 깜쌤 2013. 10. 25.

 

서기 1602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새로운 무역회사가 탄생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설립된지 1년도 안된 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배가 중국에서 도자기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돌아가던 포르투갈 국적의 무역선 한척을 나포했다.

 

 

나포된 포르투갈의 선박은 캐슬리나호였는데 여기에 실려있던 중국도자기 수십만점이 암스테르담 경매시장에서 날개돋친듯이 팔려나갔다. 이른바 초대박을 터뜨렸던 것이다. 워낙 엄청난 이익을 남겼기에 전유럽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이 경매는 전 유럽에 중국 도자기 바람을 불러올 정도로 큰 인기가 있었다. 당시의 중국도자기는 요즘 말로하면 스마트폰 정도의 최첨단제품이었고 중국 경덕진과 그 인근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명품취급을 받아 부르는게 값이었을 정도였다.

 

 

                      <터키 이스탄불 톱카피 궁전의 보물 전시실에 전시된 중국산 도자기들>

 

 오늘을 사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도자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최첨단 제품으로 비칠 정도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 도자기를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에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 기술을 도입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미 청자를 생산함으로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톱카피궁전 소장품>

 

세계제1차대전때 무너진 대표적인 국가로 중동에서는 오스만제국,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왕국을 들 수 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1453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킴으로서 역사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톱카피궁전 소장품>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이스탄불이고 황제 일가가 살았던 곳이 톱카피궁전이다. 그곳 궁전 보물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중국도자기와 일본도자기가 보관되어 있다.   

 

 

                                                         <톱카피궁전 소장품>

 

지금 소개하는 사진들은 그곳에서 촬영한 것들이다. 나는 도자기를 살피면서 혹시 조선에서 만든 도자기도 있지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정말 유심히 살폈다.

 

 

                                                      <톱카피궁전 소장품>

 

유감스럽게도 나는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 창고속에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조선자기를 그들이 수집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톱카피 궁전 도자기 전시장>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다. 일본도자기와 중국도자기는 오스만제국의 수집대상 품목이었지만 정작 높은 기술력을 간직했던 조선의 도자기나 고려때의 도자기가 보이지 않는다는데서 서글픔을 느꼈던 것이다. 

 

 

도자기가 돈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는 중국산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중국 남부 광동지방의 도자기를 사갔다. 1612년에만 해도 한척의 배가 약 3만 9천점의 도자기를 수입해갔는데 25년 뒤에는 약 37만점의 도자기를 사갈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만약 네덜란드 상인들이 조선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았더라면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을까? 우리가 알고있다시피 서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일본군은 조선인 약 10만여명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데려갔는데 주로 지식인들과 도자기 기술자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일본의 문화와 학문과 도자기산업은 눈부신 성장가도를 달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푸른빛이 도는 청화자기를 수입해가기도 했는데 주로 큐슈지방에서 조선인도공 이삼평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전에 청화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위에서 중국과 조선 정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은 당시 세계최첨단 산업의 기술자들을 주로 납치해간 것이나 다름없다. 청화백자는 원나라 시대때부터 중국 경덕진에서 생산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럽에서 판매된 중국산 도자기의 가격은 동일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다고 하니 상상을 넘어설 정도의 고가였던 것이다. 만약 그런 어마어마한 금이 조선으로 흘러들어왔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중국산 도자기는 심지어 좋은 집 한채와도 교환되기도 했고 노예 7명과도 바꾸었다고 하니 입이 딸 벌어질 노릇이다.

 

 

1653년 효종 4년, 네덜란드의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에 해당하는 바타비아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서 난파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기에 어지간한 역사교과서에는 모두 실려있을 정도다.

 

 

생존 선원 36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14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현종 통치 연간이던 서기 1666년에 헨드릭 하멜 이하 8명이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 하멜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책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책을 써냈다.

 

 

 

이 책은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1천톤급의 대형상선을 제작하고 꼬레아호라고 이름붙인 뒤 선원 31명을 승선시켜 1669년 5월 20일에 네덜란드를 출발했다. 조선자기를 수입하여 한몫을 단단히 챙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인 1670년 코레아호는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 도착해서 조선으로 떠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고있던 왜인들이 결사반대를 했기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수입한 무명과 후추를 조선에 판매하면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바가지 요금을 씌워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방해공작때문에 조선과 네덜란드가 무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던 것이다.    

 

 

일본과 무역거래를 튼 최초의 서양세력은 포르투갈 상인들이다. 일본은 그들로부터 조총제작법을 배웠다. 그때 배운 조총제작 기술로 임진왜란때 조선군을 패배시켰던 것이다. 포르투갈 세력을 물리치고 일본과 거래를 독점한 것이 네덜란드 상인들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도자기 무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돈이 되었기 때문이지만 역사의 흐름은 오늘날의 우리가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자기를 만들줄 몰랐다. 도기 제작법은 어느 정도 익힌 모양이지만 자기는 생산하지 못했기에 조선의 자기에 홀려버렸던 것이다.

 

 

 

바로 위 사진은 루마니아의 브라쇼프에서 촬영한 것이다.

 

 

브라쇼프 교외에 브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이 있다. 흡혈귀 드라큐라 백작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브란성의 모습이다. 소설에서 주는 느낌으로는 제법 음침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성은 자그만했다. 전투와 방어를 목적으로 한 성이라기보다는 거주를 목적으로 한 성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브란성 안에서 나는 중국 도자기를 찾아냈다.

 

 

왜 이런 도자기들을 전시해두었던 것일까? 당시 이런 도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주나 성주가 엄청난 부를 지니고 있음을 과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자기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도기나 토기 정도를 제작할 줄 알았다.

 

 

그게 자기의 위력이다. 그렇다면 옹기는? 옹기는 뛰어난 자기 제작기술을 지녔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속에 깊숙하게 파고든 물건이다. 비록 자기보다는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물건이지만 가장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물건이라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한꺼번에 부르는 말이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어 굽되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가 나지 않는 그릇이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서 구워내어 윤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좀 더 단단해진 그릇을 의미한단다. 도자기의 원료는 고령토를 주로 사용하고 옹기는 황토를 사용한다는 차이도 있고 구워내는 온도도 약간 다르다.

 

 

옹기가 가지는 특별한 가치는 한국인 특유의 그릇임과 동시에 숨을 쉬는 살아있는 저장용기라는 사실에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공기를 드나들게하는 기막힌 기능이 있는 그릇이기에 발효식품을 저장하는데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어지간한 시골집에는 마당한구석에 장독대가 있는 법이다. 장독대에는 간장이나 고추장 혹은 된장같은 장류식품을 담아두는 옹기들이 소복하게 모여있다. 가장 한국적인 풍경가운데 하나다. 

 

 

경주양동마을 인근에서 찍은 풍경이다.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있는 정경이다. 장독대에 가득한 그릇들 모두가 옹기로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렇듯이 옹기는 한국인의 생활과는 도저히 뗄 수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에 그 소중함을 더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옹기마을의 존재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갤러리를 찾아가다가 살림집 벽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벽면을 장식한 글자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어설픈 내 언어실력으로 짐작해보건데 이런 문장은 아무리봐도 독일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에서 독일어를 발견하다니..... 무슨 의미일까?

 

 

살림집과 자동판매기 사이에 거대한 독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