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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에 어린 시절의 진흥왕이 다녀갔다는데.....

by 깜쌤 2013. 10. 15.

 

반구대암각화를 답사한 우리들은 다음 여정인 천전리각석으로 옮겨갔다. 각석은 글자그대로 그림이나 글자를 새긴 바위를 의미한다. 각석이 있는 곳이 행정구역상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천전리이기에 보통 천전리 각석으로 부른다.

 

 

 

 

DAUM지도를 가공한 것이다. 일단 클릭해보자. 그러면 크게 뜨게되므로 이해하기가 편하다.

 

1번 - 반구대 암각화

2번 - 암각화 박물관

3번 - 천전리 각석

 

그러니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은 전혀 별개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두군데 모두 국보로 지정된 곳이고 대곡천에 자리잡았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림지도에서 밑에 보이는 호수는 사연호이고 위에 보이는 호수는 대곡호다.    

 

 

암각화박물관 부근까지 되돌아나와서 다시 계곡을 따라 산길을 걸었다. 그리 험한 길은 아니다. 편안하게 골짜기를 따라 한 이십여분쯤 걸으면 이내 대곡천을 다시 만나게 된다.

 

 

개울이 감아돌아간 산길이 끝나가면 앞이 약간 터지면서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데 그 부근에 각석이 자리잡고 있다.

 

 

계곡이 제법 아름답다. 유적이 한두개쯤 숨어 있을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비라도 조금 내리면 수량이 제법 풍부한 개울이 될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누렇게 나락이 익어가는 논뙈기가 조금 보였다. 

 

 

길은 이내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개울가로 나왔더니 너럭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쭉 펼쳐지는게 아닌가?

 

 

저 암반들 위에 공룡발자국들이 수두룩하단다. 여기가 아득한 옛날에는 초식공룡들의 놀이터였다니 흥미롭기만 했다.

 

 

안내판이 나타났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 사이는 한 십여리쯤 되려나? 트래킹하기에는 너무 멋진 길이었다.

 

 

개울 한가운데로 시멘트 다리가 놓여있었다.

 

 

물이 아주 맑았다. 상수원이어서 그런지 관리가 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개울을 건넌뒤에는 물가로 이어지는 숲길을 야주 약간만 걸어가면 된다.

 

 

개울을 끼고 앞으로 기울어진채로 버티고 서있는 바위앞면에 추상화형태의 기호들이 새겨져있는데 그게 바로 천전리각석이다.

 

 

DAUM문화유산에서는 천전리 각석에 대해 아래글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http://heritage.daum.net/heritage/16101.daum#intro

 

인용한 글의 출처는 위 주소와 같다.

 

 

 

나는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 함부로 내의견을 늘어놓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인테넷 검색을 해보면 각석그림 내용에 관해 온갖 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있는데 어떨땐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므로 검증된 지식만을 인용하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겨진 그림의 해석에 관해서는 의견이 제각각인 만큼 내가 섣불리 단정지어 말할 처지가 아니다.

 

 

학문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분들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존재하는 암각화 그림을 분석비교하여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는 모양이지만 그림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콕 집어내어 속시원하게 풀이해주는 학설은 드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몽골지방까지 답사하여 암각화를 비교해서 분석하는 모양이지만.......

 

 

학문적인 깊이가 얕은 내입장에서는 기존의 학설을 소개하는 것조차도 벅차기만 한 일이다.

 

 

그러니 나같은 삼류는 자연풍경에나 관심을 돌리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오늘날의 경주)과는 가까운 거리이니 귀족이나 화랑들이라면 말을 타고 쉽게 나들이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증거들은 암각화 하단에서 발견된다. 바위에는 책모양의 네모로 구획된 부분이 나오고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그 안과 밖에 한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서기 525년 6월 28일 새벽에 놀러와서 새겼다는 기록도 남아있다고 한다.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이 진흥왕인데 그가 어머니인 지물시혜와 함께 어린 시절 여기를 찾아왔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갈문왕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DAUM 백과사전을 중심으로 해서 조사한 내용임을 밝혀둔다.

 

 

갈문왕

 

신라 , 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 이르던 . 왕의 아버지, 장인, 외조부, 외삼촌 또는 여왕 배우자 에게 내렸으며 과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버금가는 높은 지위였다.

 

 

이것은 갈문왕이라는 칭호에 '왕'자가 들어가고 부인을 비(妃)라고 부른 것과 진흥왕 때 세워진 순수비 중 창녕비의 수가신명(隨駕臣名 : 왕을 따르는 신하의 명단) 순서에 갈문왕이 처음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나, 울산 천전리명문(川前里銘文)에 자신의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 1988년에 발견된 봉평비에서도 국왕인 매금왕(寐錦王) 바로 다음에 기재된 점에서 알 수 있다.

 

 

 

갈문왕이라는 호칭은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니라 6부 내부의 정치적 역관계에 따라 정해졌는데, 국왕이 즉위한 뒤 책봉의 형식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 갈문왕의 존재 의의는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6부의 주요 지배세력들이 그 정치적·사회적 위치를 왕에 버금가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 있었다. 따라서 갈문왕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며, 시대적 상황과 왕위계승 방법에 따라 그 뜻이 달랐다.

 

첫째, 박씨 왕 때에는 왕권의 지지 기반인 왕비족에 대한 배려로, 갈문왕이 왕비의 아버지인 경우가 많았고, 둘째, 석씨 왕 때에는 가계나 씨족이 달라지는 형제상속에 의해 왕위가 계승됨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나 왕의 외할아버지가 갈문왕이 되었다. 이는 왕의 친가·외가에 이르기까지 왕권의 지지기반이 확대되었음을 말한다.

 

 

 

 셋째,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부터는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 방법이 확립되면서 왕이 되지 못한 왕의 동생들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김씨 내부의 가계를 중요시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대부터 왕권이 점차 전제화되면서 갈문왕의 존재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대에는 갈문왕의 존재가 단 1명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서 그만큼 존재 의의가 전시대(前時代보다 약해졌음을 뜻한다.

 

 

 

신라시대부터 여기를 서석곡(書石谷)으로 부르기도 했다. 돌에 글이 새겨져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리라. 새겨진 글자에 대해 더 상세한 정보를 원하는 분들은 아래 주소를 참고로 하기 바란다. 

 

http://blog.naver.com/hunji222/70073847325

 

 

 

천전리각석 구경을 끝내 후 우리는 대곡리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물관 앞 주차장 공간위쪽으로 대곡리댐이 보였다. 댐이 완공되었으니 그 안에 있던 많은 생활터전들이 물에 잠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발굴할 것은 발굴하고 조사할 것은 조사하여 박물관을 만드는 것은 누가 봐도 옳은 일이다.

 

 

더구나 이 부근 계곡에는 귀하디 귀한 국보로 지정된 암각화가 두군데서나 발견되지 않았던가?

 

 

박물관 주변에는 허수아비 축제가 한창이었다.

 

 

박물관장님이 직접 나오셔서 우리를 영접해주시고 설명까지 곁들여주셨다.

 

 

최근에 새로 만든 박물관이어서 그런지 디자인이 산뜻했다.

 

 

박물관 구경을 끝낸 뒤 우리는 드디어 울산시내로 이동해서 장생포 고래박물관 탐방에 나섰던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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