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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광고까지 해주는 마지막 주막으로 가보시지요

by 깜쌤 2012. 4. 18.

 

서재에 꽂아둔 여러가지 종류의 책을 꺼내서 주막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백과사전을 펴서 찾아본 자료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사전자료나 서로 거의 틀린 것 없이 비슷했습니다. 옛날 이야기 속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주막이지만 실제로 주막이 어떤 모습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밝혀놓은 자료가 드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주막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식사를 제공하는 여관' 정도라고나 할까요? 예전에는 국수전(國手戰)같은 바둑 고수들의 시합도 주로 여관에서 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모두 호텔로 옮겨간듯 합니다. 바둑 시합이 열렸던 대표적인 장소가 운당여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여관에서는 그 여관의 특징을 살린 아침식사를 제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여관은 거의 사라진듯 하지만 일본은 아름답게 잘 살려 최고급 숙박시설로 거듭나게 만들어둔 것을 보며 느낀 게 많았습니다.

 

 

주막을 다른 말로는 주막집 혹은·탄막()이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주가(酒家)·주포(酒舖)라고 부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주막이 성업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주막도 덩달아 일반회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조선시대 초기에도 주막 비슷한 숙박시설은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는 맹사성(1360-1438)에 얽힌 일화를 들 수 있습니다. 맹사성은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시대에 이름을 떨친 재상입니다. 실학자 가운데 한분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 맹사성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거기에 주막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주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른바 공당놀이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인데요, 젊었던 날 다른 책에서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만 출처가 <연려실기술>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자료조사를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정승의 자리에 있던 맹사성(孟思誠)이 자기 고향 온양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용인의 어떤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주막의 숙박시설이라는게 작은 방 두어개가 있는게 전부인지라 맹사성도 다른 나그네들과 함께 묵게 되었습니다. 정승 신분을 감추고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지라 주막에 먼저 와서 묵게 된 어떤 시골 양반이 맹사성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먼저 수작을 걸었습니다.

 

 

시골 양반 하는 말이 지금부터 말끝마다 ‘공’ 이라는 글자와 ‘당’이라는 말을 달아서 서로 대화를 나누되 말문이 막히는 사람이 술을 사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씀씀이가 너그러웠던 맹사성이 선공을 했습니다.

 

"여보시오 젊은이. 어디 가시는공?"

“과거 보러 간당(전해오는 다른 이야기에는 "벼슬구하러 간당:"하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럼 내가 하나 알아봐 줄공?” 

“헛소리 하지 마시란당.”

 

 

뭐 그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답니다. 며칠 뒤 한양의 과거 시험장에서 그 시골 선비를 다시 만나 한눈에 척 알아본 맹사성이 주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공당놀이의 후편을 이어갔습니다.

 “어찌 되었는공?

깜짝 놀란 시골선비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더니 바로 용인 주막에서 공당놀이를 하였던 분이 굽어보며 말을 붙여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라서 넙죽 엎드리며 자기도 모르게 엉겹결에 나온 말이 걸작이었던 것입니다. 

"죽여주시당, 죽여주시당!"

 

 처음에는 숙박시설로 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점점 기능이 쇠퇴하였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도시에서는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 등장하였고 시골에서는 주막이 수두룩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사진은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경북 예천의 삼강나루터 주막입니다. 주막은 시골의 장터에도 생겼고 주요 길목에도 생겼으며 나루터나 역()이 있는 곳에도 생겨났습니다. 큰 고개밑에도 생겨나는게 당연했습니다. 삼강주막은 나루터에 생겼던 것이죠.

 

 

삼강은 이름 그대로 강 세개가 만나는 곳입니다. 삼강나루 주막 뒤에는 둑이 있는데 거기에 올라서서보면 일단 두개의 물줄기가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쪽(사진속에서는 아래쪽)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낙동강 본류이고 동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은 내성천입니다. 멀리 보이는 들판 저 위쪽 부근에서 금천이라는 강물이 합류합니다.

 

 

일반적으로 주막에서는 숙박료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술이나 밥을 사먹고 묵으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시골살이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전통 초가는 방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작은 방에 손님들이 복닥거리며 묵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먼저 온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주막에서는 이름 그대로 술과 안주와 밥을 팔았습니다. 술은 당연히 막걸리였고 소주를 팔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음식이라고 해도 요즘처럼 온갖 음식을 다양하게 장만해내던 시대가 아니어서 돼지고기 삶은 것이나 부침개나 빈대떡, 술국, 장국밥 정도를 팔았습니다. 제법 잘하는 집은 육포나 어포도 팔았다고 합니다.

 

 

요즘도 장을 떠돌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습니다. 지금은 물건을 트럭에 싣고 장을 따라다니며  팝니다만 예전에는 달구지에 물건을 싣고 야간이동이나 새벽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이 하는 말가운데 뒷부분에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 장 보고는 제천이다."

 

5일마다 서는 시골장을 따라다니며 난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장돌뱅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런 장돌뱅이들과 보부상들과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먼길을 오르내리던 시골 선비들에게 주막은 좋은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연지나·분, 머릿기름같은 화장품 종류와 생활에 꼭 필요한 거울이나 빗, 비녀와 바느질 도구와 여러가지 악세사리 같은 물건을 팔러다니던 여자 행상은 방물장수라고 불렀습니다. 주막에서 남녀구별을 어느 정도 엄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방물장수같은 여자들은 양반집이나 보통가정집(여염집)에서 자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주막에는 걸어다니는 사람들만 묵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을 타고 오거나 나귀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마구간도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짐승들이 먹을 꼴도 준비를 해두었을 것입니다. 그런 곳은 제법 규모가 큰 축에 들어갔을테고요.

 

 

주막임을 알리기 위해서는 장대에다가 술을 걸러내는 '용수'를 매달아놓기도 했고 술 주(酒)를 써서 문에다가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중국 무협영화에 보면 객잔(客棧)이라는 집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바로 우리의 주막에 해당된다고 볼 수있습니다. <용문객잔>이나 <신용문객잔>이라는 영화를 보면 객잔의 모습이 제법 현란하게 비칩니다.  

 

 

주막의 실제 살림을 사는 이가 바로 주모였습니다. 나이든 할머니가 운영을 하면 주파라고도 불렀고요. 길가는 나그네나 장사치가 주고객이니만큼 어지간히 마음을 강하게 먹지 않고는 꾸려나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삼강나루 주막을 마지막으로 운영하던 최후의 주모는 유옥연 할머니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흔살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주막도 문을 닫게 되었지만 민속문화와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깨달은 예천군에서 발빠르게 움직여 오늘날처럼 복원시켜 둔 것이죠.

 

 

에밀 프랑수아 졸라(Émile François Zola)가 쓴 <목로주점>을 읽어본 기억도 이젠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목로주점은 목로(木櫨)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술집입니다. 선술집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술집들은 주막의 변형판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건너다녔을 나루터에는 빈배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지럽기 짝이 없는 세월을 안고 모래바닥을 적시며 물만 유유히 흘러갑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말입니다. 굳이 인심 넉넉한 주모가 따라주지는 않더라도 텁텁한 막걸리 한잔 쭉 들이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거든 예천 삼강나루터에 다소곳이 남아있는 삼강주막으로 떠나보면 어떨까요? 거기 배추전도 맛이 제법 일품입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