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이어서 그런지 주위 분위기가 제법 칙칙했다.
그렇지만 이런 날이 오히려 낙엽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훨씬 낫다. 나는 까만색 아스팔트 위에 단정하게 그어진 하얀 선을 좋아한다. 그 위에 낙엽까지 덮여있으니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달을 밟아가며 달려온 길을 돌아다보았다. 한번씩은 뒤를 볼 줄 알아야한다. 산에 오르는 일도 그렇다. 줄기차게 앞만 보며 오를 것이 아니라 뒤돌아볼 줄 아는 여유를 가지는 사람이 현명한 자다.
나는 잠시 길을 벗어나서 자작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는 길을 찾아가보았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나무가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는 숲속의 귀부인이라 할만하다. 반짝이는 은빛 이파리를 매달고 하얀 줄기를 꼿꼿이 세운채 자라는 자작나무에게서는 고고한 기품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작나무가 가득한 산이 있다면 한번 찾아가보고 싶다. 자작나무를 한자로는 백화(白樺)라고도 한다. 白樺의 화(樺)는 '자작나무 화'자이다. 이쯤에서 시인 백석이 남긴 시를 한편 감상해보자.
자작나무(白樺)
백석(白石)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은 자작나무 천지를 보고있었던 모양이다. 여긴 벚나무 천지인데.......
길가 잔디밭에는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소록소록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발그레한 벚나무 가로수 이파리들 위로 노오란 은행나무가 솟아올랐다.
나는 피터 하밀이 쓴 단편소설 <노란 손수건>을 떠올렸다.
한해를 붙어살았던 나무에서 이제는 떨어져 나온 시든 잎들도 나름대로는 의미깊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보문호수가의 나무들은 벌써 벌거벗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활엽수들 너머로 뿌리를 박은 침엽수들은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같은 색조를 띄고 버텨내는 중이다.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나는 미래의 내모습을 읽었다.
나도 예외없이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늘 청춘이랴?
늘 푸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 넝쿨에서 베어먼 노인이 그려두고 떠난 필생의 역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뜻깊은 그 무엇하나를 남겨야 하는데......
작은 나무들조차 이파리를 남겨 거름으로라도 쓸 수 있게 하건만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돌계단에도 가을의 잔해가 수북했다.
초록과 갈색의 조화에서 나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한해를 살아온 흔적들이 가득했다.
아! 가을이다.
숲속에 숨은 기와집 속에도 가을이 스며들었다.
나는 작은 바위위에 걸터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한번 더 주위를 살폈던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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