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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0 중국-신강성:실크로드(完)

카스에서 8 - 향비묘의 진실

by 깜쌤 2010. 10. 23.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단어를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세계사를 공부할 경우 반드시 한두번은 등장하는 청나라의 황제가 사용했던 연호들이다. 청나라의 4대황제가 강희제(康熙帝)이며 5대는 옹정제(雍正帝)이고 6대는 건륭제(乾隆帝)이다.

 

 

 건륭제는 서기 1735년에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1795년까지 공식적인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서고 난 뒤에도 태상황(太上皇)으로 4년동안 섭정을 하다가 1799년에 죽었으니 공식적인 황제로서 60년, 실권자로 4년, 합계 64년 정도 권력의 최정상에 머물렀던 대단한 황제였다.  

 

 제일 위의 사진은 인민공원 정문부근의 모습이고 바로 위의 사진은 장거리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본 소학교의 모습이다. 건륭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가보려고 하는 장소가 건륭제와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건륭제가 어떤 일을 해치운 황제인지를 알면 사건의 실체가 더 정확하게 보여질 것 같아서 해보는 소리기도 하고...... 

 

 

 골목길을 나오자 큰 도로가 나타나면서 새로 지은 카스 시외버스 터미널 건물이 나타났다. 구글 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보기로 하자.

 

 

 

 1번은 색만호텔, 2번은 모택동 상, 3번은 인민공원, 4번은 장거리 버스 터미널

5번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향비묘이다. 6번은 이미 소개한바 있는 이드 카흐 모스크이고 7번이 카스 기차역을 의미한다.

 

 버스터미널은 멋지다. 현대식 건물이었다. 속에서는 기차표도 팔고 있었다. 중국도 이제는 많이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예청으로 가는 버스표를 알아보았더니 아침 9시, 10시, 11시에 있고 요금은 31원 정도라고 한다. 영어가 안통해서 한자를 써서 물어보는데 그것도 제법 힘이 들었다.  

 

 

 우리는 시내버스 20번을 탔다. 종점까지 가서 걸어갈 수 있다니까 느긋하게 있어도 된다. 당연히 요금은 1원이다. 카스 구석구석에는 현대화의 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도심 중간 여기저기 남아있는 예전의 핵심 건물들이 거의 다 사그라들고 있었다.

 

 

 종점에서 내렸다. 시내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밖에 안되니까 버스를 타고 가더라도 크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버스를 내리자 당나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중 한분은 당나귀 택시를 타고 가버렸지만 나는 걸어가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방향을 돌려 손님을 기다리는 20번 버스 옆으로 접시꽃이 피어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이파리마다 먼지가 소복이 묻어있었다.

 

 

 방향을 잃을 염려도 없다. 마음씨 좋은 현지인이 타라고 했지만 우린 기어이 사양했다. 거리가 얼마 안되므로 걸어가면서 경치를 즐기는게 낫기 때문이다.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다.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었다.

 

 

 카스에는 흙벽돌집들이 많았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니 굽지않은 흙벽돌로 건물을 만들어도 관계는 없겠다. 저렇게 허술해보여도 흙벽돌집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법이다.

 

 

 이제 거의 다 온것 같다.

 

 

 놀랍게도 향비 묘역 한켠에는 작은 못이 있었다. 부영양화 현상때문일까? 물색깔이 초록빛으로 흐렸다.

 

 

 왼쪽으로 고게를 돌리니 입구가 보였다.

 

 

 형식으로 봐서 이슬람 사원의 한쪽 모퉁이에 향비의 묘가 있는 모양이다.

 

 

 아틀라스 무늬가 들어있는 원피스를 입은 예쁜 아가씨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타일로 만든 문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솟아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입장료는 30원이다. 우리돈으로 약 5500원인 셈이니 비싸지만 안들어가고 배기랴? 중국인들도 거침없이 표를 사서 들어가는데......

 

 

크게 기대는 안하는게 좋다. 카스의 상징적인 유적이므로 들어가보는 정도로 여기면 된다.

 

 

 묘역 속에도 백양나무가 울창했다.

 

 

 카펫이 깔린 곳은 기도공간일지도 모르겠다.

 

 

 영어 안내판대로 발음을 해보면 우리가 보려고 하는 향비묘는 아바크 호자 가문의 무덤정도가 되겠다.

 

 

저 건물이다. 향비묘가 저 속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용 옷을 빌려준다는 말일까? 향비묘 맞은 편 한쪽 모서리에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초록색 타일을 많이 쓴 건물이다.

 

 

 1759년 건륭제는 군대를 보내어 위구르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침략한다. 그는 전에 이미 준가리아 분지에도 군대를 보낸 사실이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신강지역으로 군대를 보냈다는 말이 된다. 심지어 미얀마, 네팔 쪽으로도 군대를 보내어 승리를 했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칭했다고 한다. 열번 원정사업을 해서 모두 다 승리했다는 말이리라.

 

 건륭제는 살아있는 동안 네번 서쪽지방을 순방하였다고 한다. 서쪽이라면 청해성과 사천성 등을 의미한다. 그가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고 영토확장을 한 뒤 새로 얻은 영토라는 의미로 지금 우리가 여행하는 이 지방을 신강으로 명명한 것이다. 건륭제가 서순(西巡)하면서 신강지방까지 다녀갔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건륭제 자신인지 아니면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일하던 누군가가 카슈가르를 지배하고 있던 아파크=아팍) 호자 가문에 엄청난 미모를 지닌 아가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른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청의 군대가 위구르인들이 사는 카슈가르로 진격해왔을때 아팍 호자의 가문 안에서는 내분이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군대편을 들었던 향비의 친오빠 덕에 호자 가문의 일족이 북경으로 초대되어 갔는데 대궐의 잔치자리에서 건륭제의 눈에 띄어 궁중에 들어간 것이 향비라는 것이다.

 

 그도저도 아니라면 청의 무력에 굴복한 아파크 호자 가문에서 그녀를 건륭제의 후궁으로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1760년경에 호자 가문의 한 아가씨가 건륭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다는 것이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향비라는 이름은 없고 호자가문 출신의 용비(容妃)가 존재한단다. 향비(香妃)라는 말은 몸에서 향내가 풍겨났기에 붙인 이름이라는데.....

  

 위구르인들의 믿음에 의하면 그녀는 대궐에서 절개를 지키면서 살다가 3년만에 죽었고 그녀의 시신을 고향에 묻어주기 위해 다시 3년에 걸쳐 여기까지 운구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죽어서 위구르인들의 가슴속에 길이 살아남은 잔다르크가 된 셈이다. 

 

 아까 위에서 잠시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중국 한족들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 향비로 전해지는 그녀는 건륭제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용비(容妃)이며 55세의 나이로 1788년에 죽었고 건륭제의 무덤 부근에 묻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사실이건 간에 사건을 보는 관점이 너무 다른 것은 확실하다. 당연히 향비묘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중국인의 관점으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아래 사진이 그 증거이다.

 

 

 

원판사진을 그대로 올렸으므로 클릭하면 크게 뜰 것이다. 단 스크랩해간 글을 읽으면 크게 뜨지 않는다.

 

 

 향비의 전설은 무엇이 진실일까? 진실 여부를 떠나 그녀는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이런 미인이었을까?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