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안 일도 잘 모르는 주제에 남의 집안 일을 알아보고 소개한다는 것은 정말 시건방진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도 있습니다만 하여튼 요즘같은 세상에 가문을 들먹이고 나오면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비칠까봐 은근히 겁이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일 가운데 하나가 집안(家門)의 의미입니다. 집안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로 콕 찍어내어 이야기하기가 어렵지만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게 무슨 말인지는 다 알 수 있지 싶습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 명문거족이 수두룩하게 몰려있다면 화제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안동 변두리가 바로 그런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은 말로만 들은 의성김씨 종가를 찾아가보았습니다.
사노라면님의 블로그에는 의성 김씨 가문의 독립운동사가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글 때문만이 아니라 평소에 워낙 유명한 유서깊은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은터라 언제 한번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사노라면 님의 안내로 안동시 내앞(川前)에 자리잡은 의성 김씨 종가를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죠. 모르는 채로 그냥 찾아가려면 조금 힘이 들었을터인데 승용차로 현장까지 데려다 주셨으니 대단한 행운을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동대학교의 김희곤 교수님이 쓰신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이라는 책을 사노라면 님이 읽어보시고 독서후기로 올려놓은 글에 의하면 안동지방의 독립유공자는 300여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사노라면 님의 글을 잠시 인용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안동의 많은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분만 300명이 넘어 기초지방자치단체로는 독립유공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다. 전국 평균은 30명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기초지방자치단체로는 가장 먼저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했다. 이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된 장소는 ‘내앞마을’이라고 불리는 안동의 의성김씨 큰종가가 있는 집성촌이다. 독립운동기념관이 이 마을에 세워진 것은 이 마을이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에 있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을미년 의병항쟁에서부터 반외세 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고, 1907년에는 협동학교라는 신식 학교를 문중의 재원을 투입해 열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문중 단위로 남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던 문중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서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이 36명이라고 하니 어지간한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수를 넘는다. 그리고 이 망명자들은 남만주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서로군정서의 주역이 된다.
(남의 글을 복사해서 가져왔으므로 편집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혹시 읽기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위에 인용한 글 전체를 다 읽어보고 싶다면 아래 주소를 눌러보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cordblood
위에 소개한 석장의 사진은 안동시 임하면에 자리잡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모습입니다. 독립기념관이 아니고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홈페이지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부근에 의성김씨 종택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걸어도 3,4분 정도의 거리이니만큼 차를 가져갈 경우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주차시켜 두면 될 것입니다.
이제 종택(宗宅)으로 다가가 봅니다. 어설픈 집안 출신인 저는 종택이니 종손이니 하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조차도 확실치 않아서 이번 기회에 인터넷으로 이런 개념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냥 예로부터 내려오는 기와집이 덩그렇게 크다고 해서 함부로 종택이라고 부르르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우선 집으로서 종택이라는 조건을 갖추려면 "조상, 사당, 종택, 종손, 종부, 지손, 문중으로 구성된 유기체가 갖추어져야" 1한다고 합니다.
저번에 안동의 작은 음식점에 들렀다가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나누고계셨기 때문에 그냥 제 귀에 들렸던 것이죠. 불천위(不遷位)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멋모르고 끼어들었더라면 톡톡히 망신을 당할뻔 했습니다. 워낙 대화 수준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죠.
보통 제사를 모시는 집안에서는 4대에 걸쳐 기제사를 지내는 것은 원칙으로 여기지 싶습니다. 하지만 뼈대가 좀 있다는 집안에서는 후손이 이어지는 한 영원히 제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그런 분을 불천위라는 이름으로 모시고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기도 합니다.
안동에는 "불천위 종택"만도 47개에 이르며 일반종택과 합치면 약100여종택이 안동 일원에 존재하고 있다"2고 하니 유교문화가 대단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종택이 아니라 불천위 종택의 수가 50여개에 육박한다면 보통이 넘는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안동관광안내소"라는 블로그에 올라온 글에 의하면 "경상남도 전체에 존재하는 종가가 열집미만이고 알려진 종택은 2가구뿐이며, 전라도는 윤선도 종택인 녹우당이외는 현재까지 알려진 종택이 없다고"3 합니다.
그러니 저같은 사람은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나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종택으로 들어가는 담밑에는 과꽃이 가득했습니다.
종택 뒷산에는 소나무 숲이 아주 참했습니다.
종택 옆에도 큰 한옥이 보였는데 어떤 집안의 주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에 쫒기느라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주까지 가서 독립운동에 앞장서셨던 일송(一松) 김동삼선생도 이 마을 출신인 모양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아무나 양반을 하는 것은 아닌게 틀림없습니다.
핏줄만 자랑하는 양반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명문거족의 자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안 전체에 기품이 넘쳐흐르는 것 같습니다.
어디 한구석이라도 허술한데가 없었습니다.
사랑채일까요?
이 정도의 집안같으면 큰사랑과 작은 사랑이 따로 구별되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쪽 모퉁이를 돌아가보니 더 많은 건물들이 있더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본 모습입니다.
건물 전체가 정갈하게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봅니다.
한옥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니 달리 이야기드릴 건덕지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모퉁이를 돌아가봅니다.
그냥 잘지은 기와집만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여기도 사랑채였을까요?
왼쪽으로 보이는 새집이 거처인가 봅니다.
나는 한참을 서서 보았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중고등학교 동기들 가운데에는 명문의 후손들이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였던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내앞 마을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던 친구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나는 조용하게 돌아나왔습니다.
다음에 한번 더 와서 찬찬히 돌아봐야겠습니다.
안동역으로 돌아오니 기차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경주로 내려오는 내내 명가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혹시 글 내용가운데 잘못 쓰여진 부분이 있을 경우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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