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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물에 잠기기 전에 2 - 따스한 인심

by 깜쌤 2009. 5. 23.

 

 댐 건설에 대해서는 그동안 말이 많았습니다만 얼마 전 언론들의 보도가 나오고 나서부터는 이제 기정사실화된 것이 아니냐 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댐 위치와 높이에 따라 수몰면적이 결정되겠습니다만 물에 잠기기에는 너무 아쉬운 마을들이 많습니다.

 

 

 이쪽 경북 북부지방은  개발소외지구여서 민속적인 가치를 지닌 집들이 있는 마을들이 곳곳에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아름다운 백사장들입니다.

 

 

 하회무섬마을처럼 물이 S자 모양으로 감돌아나가는 금광리 마을에는 고요함 속에 서글픔이 가득했습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마을은 촌로들만이 외롭게 마을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퇴락해서 무너져 가는 집들......

 

 

이미 쓰러져 버린 집들.....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겨오는 흙집들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횟가루를 바른 저런 집들은 정말이지 아깝습니다.

 

 

 담밑에는 노랑 붓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숱한 인재들이 꿈을 가꾸었을 것입니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나는 할머니 두분을 만났습니다.

"낯선 양반은 어데서 왔니껴?"

혹시 물에 잠길 경우를 대비하여 사진으로나마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하자 서슴없이 인정어린 말씀을 뱉어내셨습니다.

"우리는 영주가가(=영주에 가서) 목욕하고 오니더. 집에 가시더. 코피 한 잔 대접할라니더."

 

 

말씀을 걸어오신  할머니는 앞장서서 걸으시고 나는 뒤따라 가며 마을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직도 따스한 인정이 살아숨쉬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계시는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 비워져 가고 사라져 가고 종래에는 잠길지도 모르는 이런 현실이 너무 서글픕니다.

 

 

 이제는 시골에도 농사지을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남아있는 이 어른들이 사라져 가면 농토들은 묵밭이 되지 싶습니다.

 "어여 오소. 여 앉으소."

나는 할머니께서 권하시는 대청마루에 걸터 앉았습니다.

 

 

 가스 레인지에 주전자 물을 올리시고는 부엌 이곳저곳을 뒤지시더니 커피를 찾아내셨습니다.

 

 

 마당 너머로 내성천 모래밭이 보였습니다.

 

 

 

 할머니가 내어주신 커피는 낯선 나그네에게 아무런 스스럼없이 대접하는 인심만큼 구수하기만 했습니다.

 

 

  할머니의 자제는 놀랍게도 행정고시를 합격한 분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 집 자제는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후배였으며 현직 고위 공무원이셨습니다. 방에는 할머니가 모신 시어머님 사진이 단정하게 결려 있었습니다.

 

 

 

 시어머님을 그리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머니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집 아가요(=자식이 말입니다), 서울 가가(=가서) 서울대학교 시험볼 때 말이시더, 그저 떨어지기만 빌었니더. 시골에 돈도 없는데 어예(=어떻게) 학교를 시키까싶어 걱정이 태산이었이니더. 요새 생각하마 그게 얼매나 부끄러운지 지구멍(=쥐구멍)이라도 있으마 들어갈라 카니더."

 

 

 아, 나는 그말을 들을 때 정말이지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감 죽고난 뒤에는 제비들도 인제는 안찾아오디더. 이거는 다 참제비 집이고 저거는 굴제비 집이시더."

 

 

 가맣게 그을은 서까래 밑에 붙은 제비집을 한참동안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오지 않는 제비들이 올해쯤엔 돌아오려나 싶어 목을 빼고 기다리는 할머니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커피 한잔을 얻어마시고 기운을 얻은 나는 작별인사를 드리고 돌아나와야 했습니다.

 

"뭐할라꼬 그리 서두르니껴? 내가 라메이나(=라면이나) 하나 살마드릴라 카이끼네 쪼매마 기다리소."

 

 

 할머니의 인정어린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 마음 자세를 가졌기에 후손이 잘되는 큰 복을 받으시는가 봅니다.

 

 

 골목에는 한낮의 철이른 땡볕이 사정없이 퍼붓고 있었습니다.

 

 

 이 동네가 물속에 잠길 것인지 아니면 운좋게 살아남을지를 현재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나는 살아남기를 빌어봅니다.

 

 

 댐이 이 부근 어디에 만들어지건간에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흔적은 물속에 사라지게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세월이 가면 다 없어질 것들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씩 잃어간다는 것은 마음아픈 일입니다.

 

 

 나는 몇시간만에 한번씩 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고개를 넘어가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담장엔 주민들의 의견을 담은 플래카드 한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미 물부족 국가로 판정난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댐이 필요하긴 하지만.......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내가 밟았던 운동장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마당도, 아니 저 건물까지도 물에 잠길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허허롭던지.......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