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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야생화, 맛/경주 돌아보기 Gyeong Ju 1 (完)

왜인동네를 가다

by 깜쌤 2008. 9. 15.

 

경주역에서 박물관 쪽으로 조금만 가면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굴다리가 나온다. 동해남부선을 달리는 기차가 도로 위로 지나가는 그런 종류의 지하차도라고 보면 된다. 어지간한 곳 같으면 건널목을 만들면 되지만 그 동네는 보기보다는 사람이 많이 살기도 하거니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아침 저녁으로 지나다니는 통학로이기에 복잡한 곳이어서 지하차도를 만들어 둔 것이리라. 

 

 

 

그 길로 계속 올라가면 왼쪽편으로 경주중교등학교와 화랑초등학교가 나오고 직선 도로가 끝날 무렵에 분황사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지하차도를 지나자 말자 바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철도관사마을이 나온다. 물론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황오동이 된다.

 

 

 강산이 두세번 변할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나도 그쪽으로 자주 지나다녔다. 직장이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추석명절을 앞두고 잠시 그 동네를 다녀오고 싶었다. 지금은 독일에서 사는 블로그 친구이기도 한 ㅎ군에게 안부라도 좀 전해주고 싶어서 사진이라도 한두장 올리려니 자료가 너무 부족했으므로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리버리한 내가 어쩌다가 배낭을 매고 물건너 나들이를 조금 해본 뒤로 나는 자꾸만 내가 사는 경주를 이런 식으로 가만 놓아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나보다 훨씬 많이 배워서 잘 아는 관계자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지만 어찌 그게 그리 썩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때도 있었다.

 

                 

 이 철도관사 마을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동네이다.  부산진과 포항역을 잇는 동해남부선과 경주와 청량리 사이의 중앙선 철도가 모두 1930년대에 건설된 철도이므로 따져보면 쉽게 계산이 된다.

 

나는 어렸을 때 철도관사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으므로 내부 구조에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철도에서 일하는 직원용으로 만들어진 사택인 철도관사 속에는 목욕탕과 부엌,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과 다다미방과 온돌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인들이 방안에 다다미를 깐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온돌방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난 뒤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조를 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런 구조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안다.

 

 

철도관사가 있는 시골에서는 관사와 관사 사이에 측백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경계선을 삼은 것으로 안다. 보통 시골역에서는 기차역 구내에도 담장을 두르지 않고 측백나무를 담삼아 조밀하게 심었다. 측백나무 가지가 우거지게 되면 아주 가지가 조밀하게 나서 사람이 빠져나가기조차 어렵기도 했다. 

 

 

내가 황오동 철도관사 마을을 굳이 가보려는 것은 지나간 날을 이쉬워하며 향수에 젖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 접근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동네 골목길을 유심히 살펴보면 네모나게 반듯반듯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골목길 한쪽으로 자동차를 주차해두고도 작은 트럭이나 택시 정도는 쉽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게 만들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보기로 하자. 

 

 

1930년대나 1940년대에 만들어진 동네치고 이 정도의 골목 넓이를 지닌 동네는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시절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동네를 가보면 골목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나게 된다. 꼬불꼬불하고 좁은데다가 하수도 시설이 이루어지지 않아 골목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질척거렸던가?

 

요즘 도회지에서 자란 사람들은 처음부터 도로와 골목이 포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예전 골목길을 한번이라도 걸어본 사람들은 해동기의 그 질퍽함과 구질구질함을 잘 기억하시지 싶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면 봄날 내내 골목길은 진흙 투성이였다. 발디딜 곳이 없어서 모처럼 차려입고 나온 한복 밑자락에 흙으로 떡칠하는 것은 예사일이 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길을 찾아보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어 있다.   

 

 

 개발 바람을 타고 1990년대부터 만들어진 경주 ㅎ동이나 ㄷ동에 가서 도로 상태를 살펴보면 기가차서 말이 안나올 지경이다. 길이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이 잘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듯반듯하게 만들어진 도로가 그리운 곳도 있으니 할말이 없게 된다. 

 

 

 1930년대에 왜인(倭人)들이 만들어 놓은 동네와 그로부터 반세기가 더 지난 뒤에 우리가 만들어놓은 길을 비교해볼때 우리가 월등하게 더 잘 만들어 두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나는 요즘들어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일본과 우리 사이에 생기는 일들을 볼때면 더욱 더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일본인들이라는 말을 쓸때도 자주 있지만 왜인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한국인과 조선인의 차이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목도 일부러 '왜인동네를 가다'라고 붙여두었다. 

 

 

 그래도 내가 우리사회에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철도관사 마을에서 만난 양심적인 사람들 때문이다. 철도관사 마을도 이제는 내외부 수리를 많이 해서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한 집을 찾기가 어렵다. 사람사는 욕구는 다 비슷한 것이므로 실용적으로 깔끔하게 수리해두고 사는 것을 나무라거나 시비걸 일은 도무지 없는 것이다. 마을 외관이 이제는 잡탕찌게 비슷하게 되어 버려서 아쉬움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참으로 오랫만에 과꽃이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과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할머니 한분이 다가오시더니 당국화(당국화)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꽃 야생종은 북한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씨앗을 받을 수 있는 시기를 묻자 할머니께서는 나중에 씨앗이 맺기 시작하면 전화로 연락을 할테니 그때 찾아오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려면 전화번호를 남겨드려야 하지 않는가? 나는 당연히 할머니께 전화번호를 남겨 드렸다. 

 

 

이런 선한 마음씨를 가진 분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좀 더 좋은 마을을 만들고  더 아름답게 가꾸어두고서 정말 사람답게 참살이를 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자기 이익에 눈멀어 새로 만드는 동네조차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후안무치한 존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경주에 살면서도 자꾸 정나미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큰일이기도 하다. 우리집 딸아이와 아들녀석은 여기가 고향이 아니던가? 

 

 

 이 집의 본채는 그런데로 아직 원래 모습을 조금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골목길을 빠져 나온 나는 경주중고등학교와 화랑초등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산 자락이 따가운 가을 햇살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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