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담장위를 기는 호박덩굴을 본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귀한 일이지만 내가 사는 경주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반월성 부근 교촌마을에만 가도 그런 장면을 쉽게 눈에 넣을 수 있다. 지난 봄 집앞 담장밑에 호박이 싹을 터올렸다. 떡잎을 보니 영락없는 호박이었다. 처음에는 박으로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고보니 호박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하고 고민아닌 고민을 했었는데 그건 나의 어리석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녀석은 얼마나 세력 왕성하게 뻗어나가기 시작하는지 여름이 되자 순식간에 장미넝쿨을 휘감아 오르더니 아예 장미 이파리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렸다.
예상치도 못하게 누렇게 익은 청둥호박 하나를 건졌다. 늙은 호박을 사과깎듯이 껍질을 벗긴 뒤에 끊어지지 않도록 길게 깎아 양지바른 곳에 널어두고 말리면 멋진 호박고지가 된다. 꾸덕꾸덕하게 마른 호박고지를 겨울철에 된장찌개 끓일때 넣어 끓이면 달큰한 맛을 풍김과 동시에 쫄깃한 식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길게 이어진 호박고지를 빨랫줄에 널어서 말리기도 했다. 어떨땐 호박고지에 벌이 달려들기도 했다. 그만큼 달달하다는 말이겠다. 박고지는 박속을 썰어 말린 것인데 상당한 고급 식재료에 들어간다.
<담장 위로 뻗어나간 박덩굴>
박이파리는 호박잎과 확실하게 구별된다. 호박잎 표먼이 꺼칠꺼칠하다면 박잎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보드라운 느낌이 난다. 호박잎은 따서 밥을 할때 같이 넣어 찐 뒤 쌈을 싸먹기도 하지만 박잎을 그렇게 해서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미 시들어버린 박꽃이 보인다. 박꽃은 흰색이다>
박꽃은 하얗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그런지는 몰라도 밤에 핀다. 하지만 호박꽃은 우리가 다 아는대로 진한 노란색꽃을 아침부터 피워댄다. 호박꽃에는 유난히 꿀이 많아서 벌들이 몰려들었다. 호박꽃에 특히 잘 달려드는 벌이 호박벌이다. 호박벌은 벌 중에서도 큰 축에 들어간다.
개구쟁이들은 호박꽃을 따서 꿀을 빨아먹기도 했다. 호박꽃속에 들어간 벌을 보면 꽃채로 따서 입구를 막은 뒤 탈출을 위해 몸부림치는 벌이 내는 온갖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벌을 잡아 노는 재미가 그리도 좋았다. 다 지난 일이지만 이젠 그렇게 하면 곤란하다. 곤충이 없으면 인간이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호박의 원산지는 중남미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오랑캐호(胡)자를 써서 박은 박인데 오랑캐들로부터 들여왔다고 해서 호(胡)박이라고부르기도 한 것으로 안다. 떡은 떡인데 오랑캐들이 먹는 떡이라고 해서 호(胡)떡이라고 부르듯이.....
청둥호박을 가르면 속에 호박씨가 가득했다. 호박씨를 방에 까는 돗자리밑에 넣어두고 겨울철에 심심하면 꺼내서 까먹기도 했다.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박씨는 단단해서 까먹기가 힘이 든다. 박씨는 맛도 별로여서 인기가 없었다.
늙은 호박으로 만드는 음식가운데는 호박죽과 호박떡, 호박엿같은 것이 있었다. 애호박으로는 부침개를 부쳐서 먹으면 맛있다. 시루떡을 만들때 호박고지를 듬뿍넣어서 만든 것이 호박떡이다. 달콤하니 더 맛이 있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맛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나는 오늘따라 호박고지를 넣은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다. 올 여름에 하나 따놓은 호박을 아내가 어떻게 처리할지 너무 궁금하다. 호박 한덩이를 앞에두고 별별 생각을 다해보았다.
늙은 호박을 골방에 저장해두고 심심할때마다 꺼내서는 범벅을 해먹고 죽을 끓여먹었다. 호박하나로 만들 수 있는 요리만 해도 얼마나 많았는데 이제는 도무지 맛볼 기회가 없다. 아! 그리운 시절이여!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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