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학교, 그 씁쓸했던 추억들 4

by 깜쌤 2018. 11. 13.



우리나라 역사에서 1988년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깊은 해입니다. 그해에는 우리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는 서울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올림픽은 개최지 도시 이름을 따서 부르는게 관례입니다. 서울올림픽은 세계사적으로도 귀한 의미를 가진 행사이기도 합니다.  



서울올림픽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학교 이야기에 그런 거창한 세계사적인 의미까지 들먹거릴 이유는 없으니 그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지금은 영일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서울 올림픽이 올렸던 그해에 나는 일생에서 네번째로 전근을 하여 영덕군에서 영일군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에는 포항시가 있고 외곽지역으로 영일군이 있었습니다. 마치 경주시가 있고 외곽에 월성군이 있었던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영덕군에서 영일군으로 전근가려면 당연히 희망하는 교사들끼리 점수경쟁을 통해서 이동을 하게 되는데 제가 발령받은 학교의 위치를 따져보면 제가 그리 높은 점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영일군 청하면에 있는 학교였는데 7번 국도에서 6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에 경주에서 버스를 사용한 통근도 불가능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거리상으로는 경주와 가까워졌기에 심리적인 부담이 조금 덜했습니다. 한 한년에 한 학급이 있는 소규모학교였는데 저번에 근무했던 바닷가 학교와 비교해보면 그보다도 더 작은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4학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남자 아이 넷에 여자 아이 넷, 모두 8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이더군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학교경리(회계)업무를 맡았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행정실이 없었으므로 교사들 봉급과 학교회계에 관한 경리업무를 교사들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맡아야했습니다. 보통 경리업무는 학교장의 절대신임을 받는 심복교사가 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만 저에게 맡긴 것은 단지 젊다는 이유 하나뿐이었을 겁니다. 



2년 근무하는 동안에 두분의 교장을 모셨는데 두분 가운데 한 분은 이야기하기가 민망하지만 한마디로 자질 부족이었습니다. 교사 양성기관을 나와서 교사를 하다가 승진해서 학교장까지 오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행동(?)이 제법 고약했습니다. 그분들의 약점을 꼭 찝어내서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교육계의 망신일 수도 있으니 그 정도로만 표현하겠습니다.    



학교내에 사택이 있어서 방 한 칸을 사용하여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올림픽을 전후하여 우리나라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자가용 구입 바람이 불었습니다. 자가용 승용차를 사용해서 포항에서 출퇴근하는 선배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주말에 집을 오갈 때 그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거기에 근무하면서 분재 기르기에 취미를 들였지만 제 자신이 너무 무식하고 철이 없었기에 산에서 소재를 구한답시고 멀쩡하게 잘 자라는 나무를 많이 베어죽였습니다. 지금이야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8명뿐인 아이들이지만 학습훈련을 잘 시켜서 마음껏 토론하고 발표하도록 지도해두었습니다. 일년에 두번씩 장학지도를 오셨던 장학사님께서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 뛰어나게 잘 한다며 수업발표대회에 꼭 참가해보도록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것을 통해 그 전에도 눈치 채고 있었던 어두운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에 실망을 많이 하게되었습니다. 승진에 눈이 먼 교직사회 이면의 추악한 모습을 알게 되어 깊은 회의만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죠. 



교사들에게는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를 가지고 연구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대회가 있습니다. 창의적인 방법을 적용해서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알게 된 사실을 논문으로 써서 발표하고 사례를 소개하는 여러가지 대회가 있었는데 그런 대회에서 벌어지는 이면의 추악한 모습도 점점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서적을 읽어야하고 참고도서를 확보하여 정독한 후 실제 현장에 적용해보고 가설을 세워 정확한 방법으로 실험을 해봐야하는 것이지만 실적확보와 승진에 필요한 점수를 채우기 위해 눈이 멀어버린 교직사회에서 그런 정도(正道)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논문대필이나 짜집기, 표절은 그때도 관행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일본어를 아는 분들은 일본교육현장에서 발표된 논문내용들을 번역하여 자기 것인양 포장하여 제출하여 입상을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아다녔으니 말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런 썩어빠진 현실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오지 못하고 물들어가려고 했던 내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부끄럽기 그지없음을 고백합니다. 저도 순수함으로 가득채운 완전무결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 때의 교직현실을 생각하면 씁쓸한 추억이 더 많아서 후배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기만 합니다.   



반년 정도 자취생활을 하다가 자전거를 구입해 7번 국도 도로변 어떤 집에 맡겨두고 집에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버스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집에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제 집 아이들이 한창 커나가던 시절이었기에 집에서 다니는 것이 그리도 좋았습니다.



좋은 추억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만난지 얼마 안 된 병아리 크리스찬이긴 했지만 유계리 마을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니기도 했고 저녁에도 틈을 내어 열심히 기도 드리기도 했습니다. 봄이면 가까운 저수지에 가서 빙어를 잡기도 했고 산이나 들로 쏘다니며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기도 했습니다.



여덟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2년동안 연속해서 가르쳤더니 나름대로는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느 정도로 가치있게 평가하느냐는 것이겠지요.



이 학교에서 이년간 근무를 하고 난 뒤 전근을 희망했습니다. 경주에서 가까운 다른 학교로 가고 싶었던 것이죠.



세월이 흐른 뒤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올해 한번, 모두 세번을 그 학교에 찾아가보았습니다. 한 때는 한의원으로 변해있더니 이제는 그마져도 운영하지 않는듯 합니다. 운영에 관한 정확한 사실 여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동네이름들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학교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나마 추억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헬라어 서명이 들어있는 윗부분의 사진들은 2006년에 찍어둔 것들이고 아래에 올린 사진들은 2009년에 찍은 사진들입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되지 않았더라면 사진을 남기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이들 그림자는 간곳이 없어지고 운동장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교앞 벌판에 가득했던 포도나무밭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리워지는군요. 이젠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