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학교, 그 씁쓸했던 추억들 3

by 깜쌤 2018. 11. 9.


세번째로 전근이 되어 근무하게된 학교는 바닷가에 자리잡은 작은 학교였습니다. 원래는 다른 공무원으로의 전직이 안될 경우를 대비해서 승진을 하기 위해 청송군으로 전출희망을 했던 터라 영덕군의 2급지 어중간한 학교로 발령을 받은 것이 불만적인 요소로 다가왔습니다.  




교사는 승진을 하기 위해서 점수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데 당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벽지점수였습니다. 행정구역 안에서도 교통이 불편하고, 중심지인 시나 읍에서 멀리 떨어진 골짜기 학교로 가야만 전근과 승진에 유리한 점수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벽지로 가야했지만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교사라는 직업속에는 가르치는 능력과 인격의 완성보다 승진에 필요한 점수를 모으는 것이 우선되어야하는 엄청난 모순점이 숨어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장이라고 하면 모두들 고결한 인품을 갖추고 실력도 대단한 분일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음을 저도 살면서 경험으로 깨달았습니다.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찌 일일이 다 까발기듯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현실은 순수함만으로 이루어진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될 것입니다.



교직초기 9년 동안 시지역 학교만 돌아다니다가 군단위의 작은 학교에 부임하게 되었으니 규모에서 오는 차이를 극복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한 학년이 40여명 정도로 이루어진 학교였기에 거기에서 오는 충격이 제법 컸습니다. 거기다가 생활근거지인 경주에서의 출퇴근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학교 숙직실에 방을 잡고 자취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정식 크리스찬이 되기 전이라 술도 많이 마셨고 전직(轉職)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던터라 공부를 계속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바닷가라고 하는 특수성 때문에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며 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놀 수 있는 분위기이기도 했습니다.  



술취한 학부모로부터 폭언을 들어본 것도 이 학교가 처음이었습니다. 교사가 과제를 낸 것에 대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서 폭언을 하는데는 이길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을 한번 당하고나면 오만가지 정이 다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과분할 정도로 대접을 받은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때 벌써 영덕대게가 귀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게 한마리 한마리가 모두 돈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걸고 잡은 그런 귀한 대게를 아낌없이 가져와서 교사들에게 대접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제 평생에 그 비싼 대게를 돈걱정 않고 먹어본 시절은 그때뿐인것 같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닷가 학교여서그런지 학부모님들 가운데는 어부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고기잡이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해변에 서서 초망으로 숭어떼를 잡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어른 팔뚝 굵기 정도 되는 숭어 한마리를 5백원만 주면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특별가격이었지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학교에 근무하는 아저씨에게 숭어를 사오시도록 부탁을 해서 장만한 뒤 숭어회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곁들여 마시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숭어회를 그렇게 자주 마음껏 먹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참으로 순하고 착했기에 큰 말썽꾸러기가 없었습니다. 이 학교에 근무했던 2년동안 6학년 담임을 두번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졸업시켜 보낸 뒤에는 얼굴 한번 못본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돌이켜보면 나역시 부족함이 많은 선생이었기에 그들에게 선하고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폭력행사때문에 허벅지가 부러진 남자아이도 생각나고,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지만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를 둔 것 때문에 힘들어하던 아이도 생각납니다. 그런가하면 대게잡이를 하러 새벽에 집을 나서 바다에 나갔다가 그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생각에 눈동자가 새빨개지도록 울기만 했던 여자아이도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어디에서 윤리교사를 하고 있을 총명했던 여자아이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카테고리 속에 자세히 써두었습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진정한 교사상을 가진 선배 선생님을 한분, 뛰어난 능력을 지닌 관리자 한분을 만났습니다. 예순다섯 정년까지 - 당시에는 교사 정년이 65세였습니다 -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며 최선을 다하시던 멋진 선생님을 만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습니다. 뛰어난 인품과 친화력이 아주 좋으신 교감선생님 때문에 교직원 어느 누구도 전출을 가지않고 똘똘 뭉쳐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은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오메가 일출을 본 기억도 새롭습니다. 남들은 한번 보기도 힘들다는 바다 일출을 겨울철에는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작가들 세계에서는 태양이 그리스 문자의 오메가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을 오메가 일출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런 장면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었으니 행운이라면 정말 큰 행운을 잡은 셈이었겠지요.



  

봄철이면 휘파람 소리를 내는 새가 숙직실 부근에서 자주 울어댔습니다. 휘파람새 소리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묘한 매력을 나에게 선사했는데 2018년 6월 일본 자전거여행을 할 때 일본 시골에서 다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농촌과 어촌에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작년 11월, 10 년만에 다시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두었었는데 관리를 잘못해서 컴퓨터에서 지워버리고는 얼마나 속상해하며 아쉬워했는지 모릅니다. 한달전에 비상용으로 보관해둔 USB를 정리하다가 그때 찍어둔 사진자료를 찾아내고는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2년만 근무하고 전근을 신청했습니다. 집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경기도에서 교사로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서 남동생 손을 잡고 제 엄마와 토요일 오후에 학교로 찾아왔던 그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습니다. 



여러모로 귀중한 추억을 가득 안겨준 학교였기에 한번씩은 그립기만 합니다. 이 학교에서 근무했던 시절 2년차부터 제 인생은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전반부가 처절한 실패의 연속이었다면 인생 중반부에서 반전이 이루어지고, 후반부에서는 가녀리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꽃을 피우도록 했던 소중한 장소가 바로 이 학교였던 셈이죠.



벌써 11월입니다. 작년처럼 짬을 내어 언제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영덕군 병곡면 북쪽 끝머리에 자리잡은 학교였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