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9 유럽-동남부:발칸반도 여러나라(完

코린토스에서 3

by 깜쌤 2020. 2. 6.

 

코린토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중간쯤에 위치한 도시였어.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병목같이 생긴 기가 막힌 입구에 위치를 잡았기에 장사로 부를 쌓아갈 수 있었어.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리스 고대사를 빛낸 도시국가라면 아무래도 아테네스파르타 아닐까?

 

 

그 다음 급에 해당하는 도시국가들이 테베코린토스 정도였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코린토스는 토기(도기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수출국가였어. 자기는 아니야. 그 당시의 고대인들은 자기라는 것을 몰랐어. 토기는 만들어 사용할 줄 알고 있었지만.... 

 

 

코린토스가 품질 좋은 토기를 제작하여 수출해서 부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정치가가 아테네에 등장했지. 그가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정치가였어.

 

 

코린토스 토기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동양적인 미를 가진 정적인 것이었어. 여기에 착안하여 그 반대로 역동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그림을 그려넣은게 아네테 토기였던 거야. 아테네에서 제작한 토기는 검은 바탕에 붉은 그림이 그려져있거나 아니면 그 반대였어. 그러니 누구라도 한번 척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거야. 

 

 

고대 코린토스 유적지 남쪽면에는 아고라가 있었어. 그 아고라 한가운데 연단이 있지. 그런 연단을 두고 베마라고 하는데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를 찾아와서 베마에서 연설을 했던 거야. 나는 바로 그 장소까지 찾아갔던 거야.

 

 

당시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바울의 흔적은 코린토스에 남았고 그 행적은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전해지게 되었어.

 

 

고린도후서 4장 17절 말씀이 영어와 헬라어로 돌에 기록되어 남아있었어. 물론 이런 돌은 후대에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져 세워진 거지. 당시는 영어를 몰랐을 테니까 그때 흔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나는 바울 사도의 흔적을 되짚어 보았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코린토스)를 다녀간 내용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18장 1절부터 기록되어 있어.

 

"이 후에 바울이 아덴(=아테네)을 떠나 고린도(코린토스)에 이르러~"

 

 

2절에는 글라우디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칼리굴라의 뒤를 이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야. 정리하면 이렇게 돼.

 

초대황제 : 아우구스투스

2대 황제 : 티베리우스

3대 황제 : 칼리굴라

4대 황제 : 클라우디우스

5대 황제 : 네로

 

 

바울 사도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설교를 자주 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는 코린토스에서 1년 반을 머물렀어.

 

 

지금은 이런 폐허가 되었지만 이천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고고학자들은 발굴했던 사실에 기초하여 당시 아고라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재현했어. 사진 속의 그림을 봐.

 

 

이 길이 레카이온 길이야. 코린토스 항구에서 코린토스 시가지 연결되는 중심 도로지. 저번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전성기때 코린토스 인구는 75만 정도였다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도시였다는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다스렸던 시대 조선 전체 인구가 500만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면 더더욱 그런 의심이 들지.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격에 해당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때 수도 로마의 인구가 벌써 백만명 수준이었어.

 

 

당시에 도시 인구가 백만이었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였어.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런 규모를 자랑했던 도시가 두개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야. 하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날 터키 남쪽 시리아와의 국경에 자리잡은 안디옥(=안티오키아)이야.

 

 

안디옥에 남아있는 예배당에도 갔었지. 그게 2001년이 일이었어.

 


 

여기가 페이레네(=피레네) 샘이야. 사도 바울은 1년 반이나 코린토스에 머물면서 허다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어.

 


 

샘이라고 하니까 단순히 작은 옹달샘을 생각하면 곤란해. 여기 이 샘터의 흔적을 봐. 이탈리아 로마에 남겨진 수도교를 흐르는 물의 양을 계산해보면 오늘날 로마 시민이 사용하는 양보다 더 풍족한 물이 로마 시내에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어.

 


 

그러니 단순한 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거야. 이런 시설을 갖춘 샘이라면 세례 의식 정도는 충분히 행할 수 있지 않겠어?

 

 

코린토스 유적지 안에만 해도 확실하게 나타난 샘터가 두개야. 다른 하나는 옥타비아 신전 부근에 있는 글라우케 샘이지.

 

 

물이 흐르는 곳 부근에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어. '물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이 이해될 거야.

 

 

쓰러져 방치된 돌기둥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증명하고 있었어.

 

 

배에서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 확실하지?

 

 

나는 레카이온 길을 천천히 걸었어.

 

 

이 도시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도시 뒤로 우뚝 솟은 아크로코린토스를 바라보았을 거야.

 

 

저 계단을 올라가면 이제 이 유적지를 나가게 될 거야.

 

 

고대 코린토스 안녕!

 

 

출구까지 걸어나온 뒤, 우리 팀 멤버들을 기다렸어.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