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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잊혀지는 것은 잊혀질만하기 때문이다 - 시낭송의 밤

by 깜쌤 2011. 6. 21.

 

경주를 대표하는 문인(文人)이라면 누가 뭐래도 동리 김시종선생과 목월 박영종선생이다. 오죽하면 불국사 부근에 동리목월기념관까지 만들어져 있을 정도겠는가? 동리선생은 1913년 11월 24일에 출생해서 1995년 6월 17일에 돌아가셨으니 어느 정도는 장수하신 편에 들어간다. 목월선생은 1916년생이고 1978년에돌아가셨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동리선생은 경주제일교회부설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경주제일교회 부설학교는 당시의 계남학교를 말하는데 여든이 넘으신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월이 흐른뒤에 현재의 계림초등학교에 병합된 것으로 알고 있다.  

 

 

동리선생은 경주제일교회를 다니셨다고 전해진다. 그 분의 모친이 경주제일교회에서 직분을 맡으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같다. 목월선생도 나중에 교회장로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리선생이나 목월선생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면 일치이겠다. 

 

 

지난 주 목요일에 경주제일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제 13회 시낭송의 밤 행사가 열렸다. 이글 제일 위쪽에 있는 사진 두장이 사회봉사관의 겉모습인데 예전교회의 모습으로 여기면 틀림없다. 돌로 벽을 쌓아올린 1950년대의 건물이다.  

 

 

시낭송회에는 제법 많은 경주의 유명인사들이 참가를 하셨다. 나같은 범부(凡夫)야 그냥 의자를 채워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알고 살면 너무 편하다.

 

 

나는 학창시절에 소월 김정식을 좋아했다. 대학에 다닐때는 박인환을 좋아했고.......  그의 시 가운데 특별히 좋아해서 외워둔 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1970년를 주름잡은 통기타 가수가운데 한명이었던 박인희씨가 부른 노래가운데 <세월이 가면>이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박인환은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 영화배우 뺨칠 정도의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지는 시인이어서 그 용모가 참으로 궁금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더니 사실이었다.

 

 

사진의 출처는 네이버 지식사전이다.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3474

 

최하림씨가 쓴 <시인을 찾아서, 최하림. 1999>에는 박인환씨에 얽힌 일화가 몇개 소개되어 있었다. 책에 의하면 그는 키가 큰 멋쟁이였다고 한다. 인물이 워낙 특출했으니 여자들에게 굉장한 인기가 있었다고 하며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캐롤 리드 감독이 조셉 코튼과 오손 웰즈를 등장시켜 만든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1949년 작품이니 참 오래된 영화다. 나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이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 있는 공동묘지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일부러 찾아갔었다. 

 

 

<제3의 사나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있던 박인환이 벌떡 일어서더니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겁니다. 영화란 이런 것이에요. 백 철씨, 아시겠습니까?"

 

 

 

                                                     <제3의 사나이>의 마지막 한장면>

 

백 철은 당대의 유명한 평론가였다. 박인환이 영화를 보다가 벌떡 일어서서 그렇게 외칠때 영화관에 백철 선생도 같이 계셨다고 전해진다. 최하림씨는 박인환의 이런 행동을 유난히 지극했던 그의 '감격벽'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적고 있다. 시사회장이었다고 하니까 그럴만도 했으리라.

 

나도 감격벽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박인환과 다른 점은 엄청난 감격을 해도 나는 그냥 속으로만 삼킨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있을때는 조금 다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의 전문을 소개해보자.

 

 

 

                                               세월이 가면

 

                                                               박 인 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시낭송의 밤이었으니 박인환의 시가 어찌 빠질 수 있으랴? 박인환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한국전쟁(=6,25전쟁) 이후의 삶은 곤궁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잘 먹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가난한 시인이었던 그는 자주 굶기도 했던 모양이다. 1956년 술을 마시다가 쓰러지고 만 그는 사흘 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박인환 시인의 아드님의 말에 의하면 사망원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단다. 

 

 

그는 서른의 나이로 죽었다. 요절한 셈이다. 그는 위스키 중에서 조니워커를 특히 좋아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양주가 너무 귀했던 시절이라 막걸리를 자주 마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담배는 낙타 그림으로 유명했던 캐멀(=카멜)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초여름의 밤은 깊어갔다. 교회에서 그런 행사를 다 하는가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말기 바란다. 교회는 열려있는 곳이지 소수를 위한 닫힌 공간이 아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