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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인생의 끝자락

by 깜쌤 2011. 6. 2.

 

아이들 세계에서 자주 쓰이는 말중에 변태(變態)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흔하게 쓰이던 말이었는데 이제는 초등학생들 입에서도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변태라고 하면 아이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도착증(性倒錯症 erotopathy)을 떠올리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교사가 조금만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했다 싶으면 변태로 몰아갑니다. 

 

 

졸지에 변태로 찍히고 나면 그 딱지를 떼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느 조직사회든지간에 한번 가지게 된 이미지를 변화시킨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것입니다. 한번 변태선생이 되고 나면 후배들에게 내려가면서 대물림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근무지가 중소도시일 경우에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더라도 소문이 따라다니게 되기때문에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오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성적인 변태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변태를 의미합니다. 곤충이나 작은 새우 종류같은 것은 일생에 한번은 꼭 변태과정을 밟게 됩니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가 되었다가 번데기가 되고 화려한 모습의 성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물학적인 변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새우나 멍게같은 것은 다른 모습을 나타냅니다만......

 

 

우리네 삶도 어떤 의미에서는 변태일 것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기로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다른 모습을 지니다가 나중에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변화하는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때도 있습니다.

 

 

번데기가 된 곤충은 자기가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곤충들은 우화(羽化)를 함으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채 삶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 뿐이겠지요.

 

 

이야기가 조금 비약하는 것 같습니다만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면 논리적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일들이 우리들 사는 세상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보는 세계와 곤충이 보는 세계는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인간은 우리가 가진 눈의 특성상 가시광선 안의 파장이 보여주는 멋진 색채로 꾸며진 세상을 보지만 곤충들은 꿀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이 보는 세상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자연이지만 종류에 따라 각기 눈에 비치는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는 것이죠.

 

 

나는 젊었던 날 한때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법 용했던 점장이 노릇을 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나 무당 혹은 점을 치는 분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신기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영적인 힘을 스스로의 힘이나 타인의 힘으로 떼어내는것이 가능할까요? 인터넷 속에는 퇴마사들의 이야기나 빙의(憑依 영혼이 옮겨 붙음)현상같은 사실들이 제법 등장합니다만 그런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또 어디까지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영적인 세계를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기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당가운데는 단순히 공부를 해서 무당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바 학습무(=학습무당)라고 부르는 사람들인데요,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영적인 존재에 사로잡혀서 무당노릇을 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강신무(降神巫)정도로 부르기도 합니다. 강신이라 함은 영적인 어떤 존재가 내려온다는 뜻이겠지요.

 

 

 경주 출신의 유명한 소설가로 김동리 선생이 있습니다. 그 분의 대표적가운데 <무녀도 巫女圖>가 있습니다. 무당으로 살아가는 모화와 그의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한없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다시 그 줄거리를 정리해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무당으로 살아가는 모화(毛火)에게는 성이 다른 남매인 욱이와 낭이가 있었습니다. 낭이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는데 그림그리기에 재주를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한동안 가출했던 아들 욱이는 예수교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모화는 아들 욱이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예수교인이 된 것에 절망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욱이가 성경을 찾으러 부엌으로 가보았더니 어머니인 모화가 성경책을 불사르며 예수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들 욱이가 모화를 말리는 과정에서 모화는 아들을 칼로 찌르게 되고 결국 욱이는 어머니의 간절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숨이 끊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때문에 거의 미치광이가 된 모화는 신들린 듯 굿을 하다가 강물에 빠져 죽습니다"

 

 

무녀인 모화가 굿을 하다가 물에빠져 죽은 곳이 바로 위에 있는 두장의 사진입니다. 경주사람들이 애기청수, 예기청수, 애기청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곳이지요. 소설 속에서는 예기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김동리 선생의 생가는 여기에서 멀지 않습니다.

 

 

무녀도는 1939년에 발표한 김동리 선생의 작품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한국대표단편문학선(성림출판사. 1992년)이라는 책에는 1935년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더군요. 모화가 아들의 죽음 때문에 미치광이가 되어 굿을 하다가 물에 빠져죽은 곳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제법 물이 깊은 곳입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부근에 있습니다. 

 

모화의 경우는 일종의 세습무며 강신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를 이어서 무당 노릇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세습무(世襲巫)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무당을 하다가 그 딸이 하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하다가 며느리가 물려받기도 합니다. 왜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영적인 어떤 존재에 관한 이해가 없다면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점을 치는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한 십여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걸어서 출근을 하던 길에 아주 남루한 옷차림을 한 영감님과 마주쳤습니다. 얼굴 표정이 몹시도 어두웠던데다가 차림새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하셨는지 어땠는지조차 구별이 안될 정도로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나를 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어른은 이런 독백을 뱉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짧다. 내가 순식간에 이만큼 늙다니....."

 

 

나는 그 영감님의 넋두리 비슷한 말씀이 내 귓전을 세차게 때렸던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르신의 독백같아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져 오더군요.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그 분이나 저나 우리들 모두는 어느 누구하나 예외없이 언젠가 죽어야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도 곤충들처럼 또 다른 그 무엇으로 변태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길래 사람은 종교활동을 하는 모양입니다. 확신이 없기에 자기나름대로 확신과 위안을 얻기위해 모두들 종교행위를 하고 절대자를 찾아 나서는 것 같습니다. 

 

 

태어날때는 순서대로 이 세상에 왔지만 죽을 때는 무작위로 순서없이 가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이 세상의 순간순간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나는 죽음이라고 하는 이 문제야말로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선현들이나 철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두고 깊이 고민했습니다. 철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이 그저 생겼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르게 사는 것이며 옳바른 것인지 모두들 한두번쯤은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확실한 해답을 가지고 확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드물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정답이며 무엇이 진리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옳바른 것일까요?

 

 

 

 

어리

버리